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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폰 서울사무소가 입주해 있는 서울 역삼동 빌딩(왼쪽)과 경기도 과천에 있는 코오롱 본사 건물(오른쪽). ⓒ 시사저널 박은숙
배트맨은 다른 슈퍼 히어로와 달리 평범한 인간이다. 그러나 총알이나 화염도 배트맨을 다치게 할 수 없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슈퍼 섬유인 ‘아라미드(Aramid)’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아라미드는 5백℃의 열에도 견디며, 총알도 뚫지 못할 정도의 강한 내구력을 자랑한다. 이 때문에 아라미드는 항공·우주 분야를 비롯해 타이어, 브레이크, 방탄복 등 다양한 산업·군수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시장 규모 역시 2010년 2조원, 2011년 3조원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국내 대기업 코오롱과 미국의 세계적 기업인 듀폰(DuPont) 사가 아라미드의 ‘생산 기술’을 둘러싸고 지금 사활을 건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최근 검찰에서 벌이고 있는 이상득 새누리당 의원의 ‘괴자금’ 수사를 둘러싸고 검찰과 정치권 주변은 물론 재계에서도 코오롱과 듀폰의 법정 공방전이 더불어 관심사로 회자되고 있다. 왜일까.
코오롱과 듀폰의 ‘소송전’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듀폰은 지난 1965년 ‘케블라(Kevlar)’라는 이름으로 아라미드 섬유를 처음으로 개발해 1973년 상용화했다. 코오롱이 아라미드 개발에 뛰어든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1979년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윤한식 박사팀과 손잡은 코오롱은 1986년, 듀폰과 다른 방식으로 ‘아라미드 펄프’라는 신소재 생산에 성공했다. 이를 인정받아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 특허를 따내기도 했다. 그러자 듀폰은 아라미드 펄프가 자신이 생산한 제품의 중간 제품과 같다며 같은 해 유럽 특허청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유럽 특허청은 1991년 아라미드 펄프의 독창성을 인정하면서 코오롱의 손을 들어주었다.
코오롱, 미국 법원 1심 손배 소송에서 패소
강철보다 5배나 강도가 높은 섬유 소재인 아라미드 섬유는 뛰어난 내열성과 내약품성을 지닌 고기능성 소재이다.
양사의 질긴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코오롱은 2005년 ‘헤라크론(Heracron)’이라는 이름으로 아라미드의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2006년 미국 시장 진출을 본격화했다. 이때 코오롱은 퇴직한 듀폰의 엔지니어 ‘마이클 미첼’을 고용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2009년 듀폰은 “미첼이 영업 비밀을 유출했다”라고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제보했고, FBI는 미첼의 집에서 기밀이 담긴 문서와 컴퓨터를 압수했다. 미국 법원은 이를 근거로 영업 비밀 누출 혐의를 인정해 2010년 미첼에게 18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코오롱에 대한 소송도 이어졌다. 듀폰은 2009년 2월 자사의 1백49가지 영업 비밀을 도용했다는 혐의로 코오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법원은 이에 대해서도 듀폰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국 버지니아 동부법원 배심원단은 2011년 9월15일 코오롱이 듀폰에 9억1천9백90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평결했다. 2011년 11월22일에 열린 1심의 최종 판결 역시 배심원 평결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다만 듀폰이 제기한 5천만 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만이 35만 달러로 줄어들었다. 코오롱이 듀폰에게 배상해야 할 돈은 우리 돈으로 따지면 1조원을 훌쩍 넘는다. 코오롱으로서는 그야말로 기업의 존폐가 걸린 소송인 셈이다.
코오롱도 즉각 반격에 나섰다. 코오롱은 2009년 4월 “듀폰이 구매자들에게 아라미드 물량의 80~100%를 듀폰에서만 구입하게 하는 조건을 부과해 시장 지배적 지위를 남용해왔다”라며 반독점 소송을 제기했다. 듀폰이 코오롱에게 손배 소송을 제기한 직후였다. 듀폰이 코오롱의 미국 시장 진출을 방해하기 위해 불공정 행위를 했다는 것이 소송의 핵심이다. 이 소송은 1심에서 기각되었으나, 미국 항소법원이 원심을 뒤집으면서 2012년 3월께 다시 진행될 예정이다. 특히 미국 항소법원은 “코오롱이 1심에서 충분한 근거를 제시했음에도 1심 판사가 공판에서 듀폰측 변호사의 일방적인 발언에만 의존해 코오롱의 소송을 기각시킨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라고 밝혀 사실상 듀폰의 불공정 행위를 인정하는 듯했다.
문제는 두 기업의 전쟁이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듀폰은 영업 비밀 침해 혐의로 코오롱을 고소했으며, 코오롱 역시 듀폰의 불공정 행위를 이유로 검찰에 진정을 넣은 상태인 것으로 밝혀졌다. 관련 수사는 현재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부(김영종 부장검사)가 맡고 있다.
한국에서의 법 다툼은 민사 소송이 아닌 형사 사건이라는 점에서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으면 재판 자체가 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검찰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코오롱이 듀폰보다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이다. 관련 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 재판 결과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설령 코오롱의 영업 비밀 도용 혐의가 인정되더라도 1조원 배상 판결은 과한 측면이 있다. 그동안의 판례를 보았을 때 3천억원 수준이 적당하다. 미국 법원이 자국 기업 편을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경우를 예상해볼 수 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인지상정 아닌가. 코오롱이 미국에서 반독점 소송을 제기한 직후인 2010년 8월, 공정거래위원회가 코오롱의 주장을 받아들여 듀폰의 서울 사무소를 조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검찰 수사도 코오롱보다 듀폰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듀폰이 정반대 입장 될 수도
‘다윗과 골리앗’에 비견되던 코오롱과 듀폰의 입장이 미국에서와 달리 한국에서는 정반대로 뒤바뀌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더군다나 현 정부에서 ‘상왕’으로 통했던 이상득 의원이 코오롱 출신인 데다, 한 인터뷰에서 “퇴임 후 1988년부터 19년째, 코오롱 계열사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월 4백만~5백만원을 받고 있다”라고 밝힌 적도 있다. 관련 업계의 관계자는 “듀폰이 세계적 기업이라고 하지만 이곳(한국)은 코오롱의 홈그라운드이다. 더군다나 코오롱은 대통령의 친형과도 인맥이 닿아 있지 않나. 검찰이 마음먹고 조사하면 듀폰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기업 소송전이 정치권 비리 의혹과 얽혀서 회자되는 탓인지, 코오롱과 듀폰 양측은 모두 검찰 수사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끼는 등 예민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기자의 질문에 대해 “검찰이 충분한 조사를 통해 진실을 규명해줄 것으로 믿는다”라는 것이 코오롱과 듀폰 모두의 공식 입장이다. 마치 입을 맞춘 듯하다. 두 회사가 수십 년 동안 전쟁 아닌 전쟁을 벌여왔던 것을 생각하면 어색할 정도의 침묵이다. 이에 대해 업계에서는 두 회사가 적당한 합의점을 놓고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관련 업계의 한 관계자는 “3월 미국에서 열리는 반독점 소송에서 만약 듀폰이 패소하게 되면 상황은 다시 한번 반전될 소지도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소송이 길어질수록 양사 모두 피해를 입을 뿐이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는 것이 낫다. 예를 들어 코오롱이 미국 시장 진출을 몇 년간 유예하는 조건에서 쌍방이 소송을 취하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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