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2일 화요일

대구 요정과 기생, 이야기로 만나면? - 매일신문 모바일웹 http://m.imaeil.com/view/m/?news_id=74154&yy=2011 춘앵각ᆞ 가미ᆞ ◆‘기생과 요정의 거리’ 대구 옛도심 한때 대구가 ‘요정 도시’로 불린 배경은 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04년 경부철도건설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대구로 몰려들면서 대구역 근처에 달성관, 명석, 화월, 대화, 대판옥, 자유사, 야상옥, 동경관 등 요릿집이 생겨났다. 이후 1909년 4월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기생들은 생업을 위해 대구기생조합(1910년 5월)을 설립, 요릿집으로 나가 예악을 팔았다. 이후 대구권번(1922년 6월), 달성권번(대구기생조합의 후신`1927년 1월)이 설립돼, 기생들을 교육, 알선, 관리, 화대징수를 맡았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 요릿집으로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도수원과 한국인이 경영하는 금호관, 해동원, 식도원, 청수원, 수향원(뒤에 죽림헌) 등이 있었다. 이 요릿집들은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서 기생을 공급받아 영업했다. 1942년 권번제도가 폐지되었고, 해방 뒤에 전남 나주에서 대구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이 대동권번을 열었으나 오래 가지는 않았고, 대동권번을 마지막으로 권번시대는 막을 내렸다. 1960년대부터는 요릿집과 권번의 역할을 합친 본격적인 요정시대가 열렸다. 요정은 기생들의 숙식을 비롯해 금전, 근무형태, 교육 등을 모두 담당했다. 그러나 기생의 교육이나 관리가 권번 때보다는 약해졌다. 1950년대에는 죽림헌, 칠락, 삼한관, 보현장, 계림관, 대구관 등이 대구의 일급 요정으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에는 춘앵각, 청수원, 신남정이 대표적 요정이었고,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에는 단추방, 가람, 가락, 십전방, 태금 등이 요정과 기생 시대의 마지막 빛을 발했다. ◆ 미니어처로 100년 요정사 한눈에 1980년대 이후 요정시대는 저물었고, 현재는 요정 ‘가미'(대구시 중구 종로1가)가 유일하게 명맥을 잇고 있다. ‘가미’는 1962년 가정집을 개조해 ‘식도원’이라는 요정으로 시작했으며, 1986년부터 ‘가미’로 이름을 변경했다. 요정 ‘가미’ 입구에는 일제시대부터 60년대, 70년대, 80년대까지 대구의 밤을 밝혔던 130여 개 요정의 미니어처가 전시되고 있다. ‘가미’ 윤금식 대표가 문헌조사와 진술을 통해 위치를 확인해 제작한 것이다. 각 요정마다 시대별로 푸른 전구, 붉은 전구, 흰 전구로 구별해 100년 요정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세월을 따라 요정의 고객도 변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 사업가들이 접대와 단합, 친교, 유흥을 위해 찾았고, 1960년대에는 주로 거물 정치인들과 고위관리, 서울과 일본인 사업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사업가들과 재력가 2세, 고급 샐러리맨들이 즐겨 찾던 친교의 장소였다고 한다. 윤금식 가미 대표는 “기생들이 인력거를 타고 요릿집을 드나드는 모습은 1920년대 종로의 가장 큰 볼거리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며 “요정이라면 어두운 면을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음악과 술, 기생이 우리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측면도 많이 있다”고 말했다. ◆ 전통 예악의 가교 역할 기생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작부, 창녀, 팜므 파탈, 예인 등으로 다양하다. 이 모든 이미지를 다 갖춘 기생들도 있었고, 부분적인 이미지에만 어울리는 기생들도 있었다. 조선시대 관기와 일제시대 권번에 속해 요릿집을 출입했던 기생들은 예인에 무게감이 실린다. 그런가 하면 60년대 이후 요정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여인들은 예악보다는 유흥업 종사자에 무게감이 더 실린다.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활동했던 기생들이 전통사설, 판소리, 기악, 춤, 신파극 변사, 예악 등 전통음악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예인이자 전통 예악의 지킴이였다. 권번에서 어른 기생들이 어린 기생들을 가르쳤고, 그렇게 대를 이어온 기생들이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맥을 이어왔던 것이다. 대구는 한때 ‘요정 도시’로 불렸다. 일제시대부터 1990년대까지 대구 중심가에 130여 개 요릿집이 도심 곳곳에서 불을 밝히고 밤문화를 이끌었다. 옛 대구읍성(현재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안에만 70여 개의 요정과 대구권번, 달성권번이 있었다. 경상감영시절에는 대구부 교방과 경상감영교방도 읍성 안에 있었다.

대구 요정과 기생, 이야기로 만나면? - 매일신문 모바일웹
http://m.imaeil.com/view/m/?news_id=74154&yy=2011

춘앵각ᆞ
가미ᆞ

◆‘기생과 요정의 거리’ 대구 옛도심

한때 대구가 ‘요정 도시’로 불린 배경은 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04년 경부철도건설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대구로 몰려들면서 대구역 근처에 달성관, 명석, 화월, 대화, 대판옥, 자유사, 야상옥, 동경관 등 요릿집이 생겨났다. 이후 1909년 4월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기생들은 생업을 위해 대구기생조합(1910년 5월)을 설립, 요릿집으로 나가 예악을 팔았다. 이후 대구권번(1922년 6월), 달성권번(대구기생조합의 후신`1927년 1월)이 설립돼, 기생들을 교육, 알선, 관리, 화대징수를 맡았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 요릿집으로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도수원과 한국인이 경영하는 금호관, 해동원, 식도원, 청수원, 수향원(뒤에 죽림헌) 등이 있었다. 이 요릿집들은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서 기생을 공급받아 영업했다.

1942년 권번제도가 폐지되었고, 해방 뒤에 전남 나주에서 대구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이 대동권번을 열었으나 오래 가지는 않았고, 대동권번을 마지막으로 권번시대는 막을 내렸다.

1960년대부터는 요릿집과 권번의 역할을 합친 본격적인 요정시대가 열렸다. 요정은 기생들의 숙식을 비롯해 금전, 근무형태, 교육 등을 모두 담당했다. 그러나 기생의 교육이나 관리가 권번 때보다는 약해졌다.

1950년대에는 죽림헌, 칠락, 삼한관, 보현장, 계림관, 대구관 등이 대구의 일급 요정으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에는 춘앵각, 청수원, 신남정이 대표적 요정이었고,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에는 단추방, 가람, 가락, 십전방, 태금 등이 요정과 기생 시대의 마지막 빛을 발했다.

◆ 미니어처로 100년 요정사 한눈에

1980년대 이후 요정시대는 저물었고, 현재는 요정 ‘가미'(대구시 중구 종로1가)가 유일하게 명맥을 잇고 있다. ‘가미’는 1962년 가정집을 개조해 ‘식도원’이라는 요정으로 시작했으며, 1986년부터 ‘가미’로 이름을 변경했다.

요정 ‘가미’ 입구에는 일제시대부터 60년대, 70년대, 80년대까지 대구의 밤을 밝혔던 130여 개 요정의 미니어처가 전시되고 있다. ‘가미’ 윤금식 대표가 문헌조사와 진술을 통해 위치를 확인해 제작한 것이다. 각 요정마다 시대별로 푸른 전구, 붉은 전구, 흰 전구로 구별해 100년 요정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세월을 따라 요정의 고객도 변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 사업가들이 접대와 단합, 친교, 유흥을 위해 찾았고, 1960년대에는 주로 거물 정치인들과 고위관리, 서울과 일본인 사업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사업가들과 재력가 2세, 고급 샐러리맨들이 즐겨 찾던 친교의 장소였다고 한다.

윤금식 가미 대표는 “기생들이 인력거를 타고 요릿집을 드나드는 모습은 1920년대 종로의 가장 큰 볼거리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며 “요정이라면 어두운 면을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음악과 술, 기생이 우리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측면도 많이 있다”고 말했다.

◆ 전통 예악의 가교 역할

기생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작부, 창녀, 팜므 파탈, 예인 등으로 다양하다. 이 모든 이미지를 다 갖춘 기생들도 있었고, 부분적인 이미지에만 어울리는 기생들도 있었다. 조선시대 관기와 일제시대 권번에 속해 요릿집을 출입했던 기생들은 예인에 무게감이 실린다. 그런가 하면 60년대 이후 요정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여인들은 예악보다는 유흥업 종사자에 무게감이 더 실린다.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활동했던 기생들이 전통사설, 판소리, 기악, 춤, 신파극 변사, 예악 등 전통음악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예인이자 전통 예악의 지킴이였다. 권번에서 어른 기생들이 어린 기생들을 가르쳤고, 그렇게 대를 이어온 기생들이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맥을 이어왔던 것이다.

대구는 한때 ‘요정 도시’로 불렸다. 일제시대부터 1990년대까지 대구 중심가에 130여 개 요릿집이 도심 곳곳에서 불을 밝히고 밤문화를 이끌었다. 옛 대구읍성(현재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안에만 70여 개의 요정과 대구권번, 달성권번이 있었다. 경상감영시절에는 대구부 교방과 경상감영교방도 읍성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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