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2월 27, 2008 — Digital Angel Master출처 : http://www.aspire7.net/english/reference-1-2-a.html A. 제국주의의 의미와 역사 1. 제국주의의 의미 제국주의는 지난 4~5세기 동안 세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소입니다. ‘제국주의’는 강대국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우월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요소를 이용하여 약소국의 토지, 노동력, 원자재, 농산물, 시장을 수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인 고대로부터 있어 왔는데 주로 피정복민을 노예화하고, 세금이나 공물 등을 바치게 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취했습니다. 20세기 이후에는 대기업의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면서 공산품뿐만 아니라 기계, 기술, 투자, 차관의 형태로 자본수출이 이루어졌고,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한 생산기지 이동이 일어났습니다. 자본주의는 또한 치열한 경쟁을 유발하기 때문에 저렴한 생산기지와 넓은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은 정부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게됩니다. 현재 400개의 대기업들이 비 공산권의 세계 자본의 80%를 소유하고 있고, 제3세계로 투자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대기업들의 이익을 늘려 주었지만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의 빈곤과 정치적 혼란을 증대시켰습니다. 제 3세계의 부(富)는 천연자원의 수탈, 차관의 이자를 갚기 위한 세금, 외국인 소유 부동산에 대한 임대료, 과중한 로얄티, 고가의 공산품 강매 등의 방법으로 외국 대기업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에 충성하는 포악한 군사 독재 정권에 시달리거나, 공기업을 외국에 팔아 먹는 부패한 정권으로 인해 사회복지는 줄어들고, 빈부격차는 심화됩니다. 2.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제국주의는 강대국이 상대적 힘의 우월을 이용하여 약소국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등 다방면에 걸쳐서 지배하려는 침략주의적 경향입니다. ‘임페리움’이 근대에 다시 쓰여진 동기는 영국 신문 ‘데일리 뉴스’가 1870년 6월 8일자 신문에서 나폴레올 3세의 전제적 제2제정을 제국주의라 지칭하면서부터였습니다. 19세기 중엽에 근대자본주의 체제를 확립했던 영국은 세계 전역에 걸쳐 통상권을 지배하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영토를 병합해 갔습니다. 세계는 자본주의 제국간의 경쟁시대를 맞이했고, 특히 1873년부터 23년동안 유럽을 강타한 경제 대불황은 경쟁을 더욱 가속시켰습니다. 장기적인 경제공황은 영국 이외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의 원료공급지와 소비시장으로서의 식민지 획득이라는 대외정책과 독점적 기업결합이라는 대내정책을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영국의 아프라카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이 정면으로 충돌한 파쇼다 사건과, 독일과 프랑스가 충돌한 모르코 문제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자본주의국가 간의 경쟁은 필연적으로 카르텔이나 트러스트 같은 독점적 기업결합을 출현하게 하였고, 독점자본에 의한 과잉생산은 소비시장으로서뿐만 아니라 자본 투자지로서의 식민지를 더욱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a) 고전적 제국주의 비판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국가를 착취하면서도 식민지 경영이 식민지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도움을 준다고 선전하였습니다. 보어전쟁을 계기로 사람들은 제국주의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J.A. 홉슨은 남아프리카를 방문해 보어전쟁의 배후에 금융업자들이 있다는 심증을 굳히고, 귀국하여 제국주의를 자유주의적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비판한 ‘제국주의론’(1902)을 썼습니다. 오스트리아의 R. 힐퍼딩은 ‘금융자본론’(1910)을 통하여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은행자본을 금융자본이라고 규정하고, 금융자본에 의한 산업과 카르텔·트러스트와 같은 독점적 기업결합을 자본주의의 새로운 특징이라고논함으로써 제국주의를 금융자본이 대외적으로 취하는 정책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독일의 K.J. 카우츠키는 힐퍼팅의 이론을 발전시켜 초(超)제국주의론을 내세웠습니다. 이에 대해 독일의 R. 룩셈부르크는 ‘자본축적론’(1913)을 통해 자본주의의 자본축적은비자본주의 지역의 수탈을 매개로 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보호관세와 군국주의 같은 제국주의 경향과 비자본주의 지역의 축소화가초래되어 자본주의는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b) 레닌의 제국주의론 제국주의에 대해 가장 포괄적이고 역사적인 정의를 내린 사람은 레닌입니다. ① 자유경쟁자본주의의 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 자 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시장경쟁을 통하여생산과 자본이 점차 소수의 대기업에 집중되며, 생산과 자본의 고도 집중은 카르텔·트러스트·신디케이트와 같은 독점적 기업결합으로발전한다. 이는 다시 시장과 가격의 지배를 통해 독점적 고이윤을 생산함으로써 한층 더 발전된 소수의 기업결합체로 발전한다. ② 지배적 자본형태로서의 금융자본의 존재: 기업독점은 자금융자와 주식발행 등을 통하여거대산업과 거대은행의 융합을 가능하게 하는데 여기서 금융자본이 형성된다. 금융자본은 생산과 자본을 지배하고 독점이윤을취득함으로써 경제 전반에 걸쳐 금융과두제(金融寡頭制)를 가능하게 한다. ③ 후진국에 대한 자본수출: 독점과 금융자본에 의해 형성되는 과잉자본은 높은 이윤과유리한 투자기회를 찾아 후진지역으로 수출된다. 배타적이고 특권적인 거래조건(특혜적 통상조약, 철도와 항만의 배타적 점유, 유리한조건의 증권발행 등)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수출은 금융자본의 막대한 이윤의 원천이다. ④ 시계시장의 분할·지배: 전기산업·석유산업·국제금융자본 등은 카르텔·트러스트·신디케이트 등을 통해 세계시장을 분할·재배한다. ⑤ 열강에 의한 식민지 분할의 완료: 세계시장의 재분할은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경제적 기초가 된다. 이와 같은 제국주의의 발전과정에 따라 1914년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미국, 일본 등 6대열강에 의해 아프리카의 90%와 남태평양 군도의 대부분이 식민지로 전락하였습니다. 제국주의는 금융자본의 독점적 지배와 정치적 장악 위에 성립되는데, 오히려 자본주의의 쇠퇴를 가져옵니다. c) 현대의 ‘신 제국주의’ 비판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식민지가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나서는 전통적인 제국주의와는 다른 양상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선진국의 금융자본이 투자, 채무, 무역관계 등을 통해 후진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 수탈한다는 ‘신 제국주의’ 이론이 등장하였습니다. 3. 고전적 제국주의의 역사 19세기 들어서 세계는 독일, 이탈리아, 미국, 일본, 러시아의 민족적 통일을 이루었고,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의 이익을 중시하는 국가주의가 독점 자본주의와 결합함으로써 대외팽창적인 제국주의를 낳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와 산업주의가 고도화되면 자유경쟁이 심화되어 대자본이 중소자본을 흡수하고, 트러스트(기업협동), 카르텔(기업연합)이 등장합니다. 독점자본이 은행을 장악함으로써 의한 자본의 집중화는 절정에 달하고, 독점자본가는 정치인을 매수하고 조종해 의회정치에 개입하며, 국가의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정책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열강은 자본의 수출과 식민지 분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민족적 자립을 부정하고, 전통사회의 해체과정에서 반동세력을 이용했기 때문에 각 지역의 내부적 분쟁을 격화시키게 되었습니다.
(1)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 ①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탐험으로 아프리카가 소개되자, 유럽 열강이 앞을 다투어 아프리카로 진출하였다. ② 제국주의 열강의 분할로 라이베리아와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전 지역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2)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① 영국의 종단 정책 : 수에즈 운하를 매수하고, 남쪽의 케이프타운에서 북쪽의 카이로를 연결하는 종단 정책을 추진하였다. ② 프랑스의 횡단 정책 : 알제리를 거점으로 삼고, 동쪽의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진출하여, 아프리카를 동서로 연결하는 횡단 정책을 추진하였다. ③ 파쇼다 사건(1898) : 영국의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은 수단의 파쇼다에서 충돌하였다. c) 유럽 열강의 아시아·태평양 분할 ① 영국 : 인도와 동남 아시아의 미얀마, 말레이 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② 프랑스 : 인도에서 밀려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③ 네덜란드 :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고 향료 무역을 독점하였다. (2) 유럽 열강의 태평양 분할 ① 태평양의 여러 섬들도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② 미국의 태평양 분할 : 미국은 에스파냐와 싸워 필리핀을 얻었고, 1898년에는 하와이 제도를 병합하였다. d) 제국주의 유럽 열강의 대립 (1) 삼국 동맹 ① 배경 : 통일 후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들어선 독일은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삼국동맹을 맺었다. ② 동맹국 : 독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가담하였다. (2) 삼국 협상 ① 배경 : 독일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와 영국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삼국 협상을 맺었다. ② 협상국 : 프랑스는 러시아, 영국과 함께 삼국 협상을 맺음으로써 독일의 팽창 정책에 대응하였다. (3) 유럽 열강의 대립 : 유럽 열강은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이라는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 팽팽히 맞서게 되었다. e)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 (1) 발칸 반도 ① 발칸 반도 : 독일의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②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합병 : 슬라브 족이 많이 거주하던 이 지역을 오스트리아가 합병하자, 오래 전부터 이 곳을 탐내던 세르비아가 분개하였다. (2)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합병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대립이 더욱 심해졌다. 4. 신 제국주의 제국을 경영하는 것이 항상 강대국에게 이익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강대국들은 식민지를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것보다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경제적 효용을 얻는 것이 비용이 적게들어 더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946년 필리핀이 독립되었을 때도 미국인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법에 따라 필리핀의 천연자원 개발과 공공 시설 운영에 대해 필리핀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 받았습니다. 금융거래와 대부는 외국 기업에 장악되었고, 필리핀의 대 달러 환율은 2:1로 고정되었으며, 미군은 주요 토지와 해군기지에 대한 조차를 승인받았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생산력을 잃지 않은 유일한 강대국인 미국은 대기업을 위한 세계 자본주의의 보호자가 되어 각국의 민중을 위한 사회주의적 또는 민족주의적인 운동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 신 제국주의의 유형과 특징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a) 불평등 무역 관계 제 3세계의 경제는 주로 노동 집약적인 공산품이나 농산물의 수출에 의존하는데, 이를 수입해 줄 강대국은 많지 않으므로 자연히 불평등한 무역관계를 성립하게 됩니다. 만약 약소국이 말을 듣지 않으면 무역제재를 가하게 되는데 피해는 당연히 약소국이 더 많이 입게 됩니다. b) 산업화에 대한 방해 약소국은 천연자원을 강대국에게 수출할 때는 면세 혜택을 받지만, 공산품을 수출할 때는 높은 세율을 적용 받습니다. 제 3세계 국가의 제조업 분야의 자산 가운데 절반 이상을 외국 기업이 소유하고 있고, 주식 소유를 통해 경영의 주도권을 갖고 있습니다. c) 해외 원조 후진국은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 중 일부를 선진국의 원조에 의존하는데 이 자금은 강력한 통제 수단이 됩니다. d) 채무를 통한 지배 제 3세계는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대부분 서방 은행이나 IMF, 세계은행 등의 차관에 의지합니다. 채무 국가는 수출액의 대부분을 빚을 갚는데 사용하므로 국민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외국 기업은 경제위기로 폭락한 부동산과 기업을 헐값에 인수하게 되고, 각종 유리한 조건과 세금 혜택을 받으며, 상대적으로 토착 기업에게 주어지던 혜택과 보조금은 줄어듭니다. 금 본위제가 폐지된 이후 제공 받는 차관은 근거 없이 찍어낸 가짜돈이며, 이자를 갚아 나가는 것은 그 나라의 국부(國富)를 유출하는 것으로 국민을 가난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e) 불균형한 개발 약소국의 균형 잡힌 경제 개발은 왜곡되고, 다국적 기업 투자자들에게 유리한 몇몇 분야에만 집중됩니다. f) 문화적 침투 세계 각국 사람들은 영화와 팝송, 음식 의류 등 미국의 보편적이고 실용적이며 쾌락 지향적인 문화에 익숙해져 미국의 지배를 거부감 없이 받아 들이게 됩니다. 미국 CIA는 세계 전역에 200 종류가 넘는 신문, 잡지, 통신업체, 출판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각 국의 친미 언론인을 관리 교육하고 지원하고 있습니다. g) 정치적 침투 워싱턴은 세계 각국의 보수적이고 친미적인 정당들에게 재정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냉전 이후에도 미국은 세계 각국에 군사기지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미국은 제 3세계의 친미 무장세력, 정보부대, 헌병대, 테러단에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반동적 요소를 억압하고 반미 인사에 테러를 가해 왔습니다. h) 신 제국주의로 인한 피해 신 제국주의로 인해 제 3세계에서 개발된 것은 치명적이고 착취적인 형태의 의존적 자본주의입니다. 미국 국민도 신 제국주의의 피해자인데 높은 국방비(2004년 480조원)를 유지하기 위해 높은 세금을 부담해야 하고, 국내의 제조 업체가 해외의 값 싼 노동 시장으로 옮겨가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신 제국주의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국민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으며, 오직 다국적 기업만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B. 강대국의 흥망 역사적으로 수 많은 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는데, 강대국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요소는 군사력입니다. 역사학자이자 미국 예일대 교수인 폴 케네디 교수는 5년동안 전 세계의 역사, 정치, 경제, 군사 행태를 분석하고 경제력과 군사력 간의 밀접한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강대국들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찾아 내었습니다. 1,2차 대전 중에 전쟁으로 막대한 국방비를 소모하며 탈진한 유럽은 몰락하였고, 전쟁물자를 대며 피해를 입지 않고 경제성장을 한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은 국방비를 거의 지출하지 않고, 경제성장에만 전념한 결과 눈 부신 발전을 이루어 유럽과 아시아에서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1. 산업 혁명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시대 (A.D. 1815~1885) 유럽에서 중세 이후 산업혁명 이전까지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각국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8세기까지는 유럽에서 중상주의적인 정책으로 국가 간의 충돌이 잦았지만 19세기 들어서면서 자유무역과 국제적 화합이 강조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은 열을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기계를 발명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인구도 꾸준히 증가하였는데, 유럽의 인구는 1750년 1억 4천만명에서 1850년 2억 6600만명으로 증가했습니다. 19 세기 영국은 방적의 기계화로 생산성이 몇배나 증가하였고, 인도나 중국은 공업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랭커셔 직물공장에서 나오는 값싸고 질 좋은 제품들은 인도와 중국에서 ‘역 산업화’(deindustrialize)를 초래하였습니다. 1860년경 영국은 세계 철강생산의 53%, 석탄과 갈탄 생산의 50%를 차지했으며, 세계 원면 생산량의 거의 절반을 소비했습니다. 경제적 우위와 함께 군사적 우위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와 통치를 더 쉽게 하였습니다. 1860년대에 영국의 국민총생산은 10억 파운드에 달했으나, 국방비는 국민 총생산의 2~3%를 소비하는데 그쳤고, 중상주의적인 보호무역 정책보다는 자유무역조치를 취했으며, 이로 인해 영국은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영국은 막대한 양의 원료와 식량을 수입해 또한 막대한 양의 직물과 철강 제품을 수출하는 국가가 되었고, 이렇게 축적된 자본은 해외에 투자되어 또한 큰 소득을 올려 주었습니다. 2.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제국주의 열강들의 대립 (1885~1914) 19세기 말에는 영국에 이어 프랑스와 독일, 미국, 러시아도 산업화를 이루었고, 해외 식민지를 놓고 대립을 벌였습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충돌이 잦았는데 1885년에는 콩고를 놓고 싸움을 벌였고, 1890년대에는 서아프리카에서 전쟁을 벌였으며, 1898년에는 아프리카 파쇼다에서 대립했습니다. 영국은 1900년에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이루었는데, 1200만평방마일의 땅과 세계인구의 1/4을 지배하였습니다. 영국의 전통산업인 석탄, 직물, 철강 산업의 세계적인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고, 화학, 기계공구, 전기제품 등의 산업에서 선두 지위를 뺏기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말 영국의 생산성 저이브 경쟁력 약화는 빈약한 투자, 생산시설의 낙후, 국민성, 교육제도 등에 기인합니다. 이 시기에 미국은 남북전쟁을 끝내고 ‘비옥한 농토’, ‘막대한 원료’, ‘풍부한 자원’, ‘근대 기술의 발전’, ‘철도 건설’, ‘외국 투자자본의 유입’ 등을 힘입어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전에는 면화나 금 등 원료를 수출하고 완제품을 수입했으나, 남북전쟁 이후에는 산업이 발달하여 농기계, 철강제품, 기계공구, 전기장비 등 공산품을 수출하였습니다. 3. 1차 세계대전 – 제국주의 열강들의 총력전 (1914~1918) 1차세계 대전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입니다. a)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분할 제 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초엽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적인 세계전쟁이었는데, 그 발발의 배경에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나타난 세계 제국주의의 성립이 있었다. 이 시기에 유럽 제국과 미합중국, 약간 뒤늦게 일본 등에서는자본주의 경제가 독점단계로 들어가, 각국은 대형화한 경제력의 배출구(판로)를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는 해외에서식민지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거의 분할되었으며, 이제는 그재분할이 열강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의 쿠바나 필리핀을 둘러싼 미국-스페인전쟁이나,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 후,20세기에 들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재분할 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된 것은 ‘아시아의 병든 대국’인 중국과 투르크(터키)였다.따라서 중국 동북(만주)과 한반도의 지배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러 ·일전쟁의 배후에는 각각 영국 ·미국과 프랑스 ·독일이 있으며,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의 중심은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 간의 항쟁에 있었다. 그러나 러 ·일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고, 다시 그 진로를 발칸 ·중근동으로향했기 때문에,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무대는 종래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지배영역이었던 발칸·근동지역으로 옮겨졌으며, 그 곳에서 대립의 주역이 된 것은 영국과 신흥 독일이었다. b) 삼국협상과 삼국동맹 러 ·일전쟁 후의 세계정세의 새로운 전개는 이미 전쟁 중인 1904년, 영국 ·프랑스협상 성립에 의하여 시작되고있었다. 이 2대 식민제국은 세계 각지에서의 양국의 대립을 해소하고, 특히 이집트와 모로코를 서로 상대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여협정을 맺었다. 이어 영국과 러시아도 러 ·일전쟁 후 중국에서의 대립이 완화됨으로써 접근하기 시작하여, 독일의 근동진출과이란에서의 입헌혁명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양국은 이란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는 등, 1907년 영국-러시아협상을성립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3국간의 협상체제는 이들 3국이 세계 가운데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과시인 동시에, 3 국협상과 3국동맹의 대립의 주축은 영국과 독일로서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식민제국과 그경쟁에 뒤늦게 참가한 신흥 제국주의국간의 대립을 나타내고 있었다. 양국 대립의 근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188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3C정책(Calcutta ·Cairo ·Capetown을 잇는 지배권)과 독일의3B정책(Berlin ·Byzantium ·Baghdad를 잇는 지배권) 간의 암투는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 양국은 세계시장에서 격렬한 경제 경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1898년에 독일이 대함대 건설에 나서면서 건함(建艦)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양국간 경쟁은 더욱 격화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화에 반대하여 1905년 3월, 제1차 모로코사건을야기시켰으나,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하였고, 영 ·프의 협력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1911년 7월의 제2차모로코사건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독일의 외교공세는 두 번 다 실패하였다.한편 1903년 이래, 독일은 투르크에서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또 투르크 육군의 근대화를 지도하여 이 나라에 대한영향력을 강화하여 갔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 고립함에 따라 독일의 대외 진출의 중점은 근동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독일의3B정책은 지중해로의 진출구인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를 노리는 러시아의 진출과 함께 대영제국의 생명선을 잇는3C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영국과의 마찰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 대립에서 이른바 주역을 담당하였던 영국과 독일은 서로 예리하게 대립하면서도, 그행동은 신중하였다. 양국은 1908~12년 해군 군축 교섭을 계속하였고(불성립), 또 근동에서도 오랜 교섭 끝에 타협에도달하였다. 결국 대전은 양 대국의 직접적인 충돌에서가 아니라, 협상 대(對) 동맹이라는 두 개의 블록 사이의 대립, 특히 양진영 내에서의 조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에서의 대립을 직접적 계기로 하여 발발하였다. c) 발칸문제 발 칸은 일찍이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고 ‘유럽의 화약고’였다. 이 곳에 열강,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진출하고있어서,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걸고 슬라브계 제민족의 결집을 꾀하였으며, 한편 오스트리아는 이 영향을 겁내어, 독일의지지하에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1908년 투르크에 혁명이 일어나고 불가리아가 독립하자, 오스트리아는슬라브인이 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지원을 바랐으나 러 ·일전쟁과제1혁명(1905)의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배후의 독일과의 충돌이 두려워 1909년 독일의오스트리아의 병합정책 지지성명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후 러시아는 1912년,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에게 발칸동맹을 결성케 하였고 같은 해, 동맹은 투르크와싸워(제1차 발칸전쟁) 승리하였으나 투르크로부터 얻은 영토의 분배를 놓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기타 제국 사이에 1913년 재차전쟁(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다. 패한 불가리아는 이후 오스트리아 ·독일에 접근하였으나 세르비아의 승리는 러시아의범슬라브주의의 승리를 뜻하여 오스트리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리하여 유럽의 일각 발칸에서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세력 확장때문에 소국(小國)의 운명을 조종하여 대립을 격화시키고 이 곳에서의 전쟁의 불꽃이 전유럽을 휩쓰는 위험한 정세를 만들어내고있었다. d) 대전의 발발 1914년 6월 28일, 긴장이 고조되는 발칸의 일각,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육군 대연습의통감(統監)으로 이 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밀파한 7명의 자객 가운데G.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고자하였으며, 독일도 그것을 지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붙여 최후통첩을보냈으며, 이것이 일부 거부되자, 즉각 세르비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28일에는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 동안, 오스트리아는7월 5일에 황제 특사를 독일로 보내어 대(對)세르비아 강경방침에 대한 독일측의 양해를 얻었다. 종래의 정설은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끌려서 전쟁에 말려들었다고 보았으나 근년의 연구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방침을내세우면서도 주저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를 격려하고, 오히려 빨리 전쟁을 개시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 독일측이었음이 밝혀졌다.독일의 정부 ·군부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러시아나 프랑스까지도 끌어들이는 유럽전쟁으로 될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이와 같은 강경방침을 선택한 것은 깊어져 가는 국제적 고립과 해외 진출에서의 벽에 부닥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쟁의 위험을무릅쓴다는 결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일이 이 시기를 택한 것은 독일측의 군비강화가 1914년 여름에 그 절정에달하는 데 대하여, 프랑스나 러시아의 그 시기는 1915년 또는 1916년이었음으로, 따라서 지금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기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대(對)세르비아 선전포고에 대하여 즉각 대(對)오스트리아 동원을 하고30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려, 이 또한 전쟁의 국지화(局地化)를 불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23~27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를조정해 달라는 영국의 여러 차례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였다. 그러나 29일 심야, 영국의 중립 예상이 무너지고 전쟁개입이확실해지자 독일의 정부 지도자는 그 때까지의 강경한 태도를 약간 바꾸어,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에 응할 것을 권장하였다.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7월 위기’는 위기로 그치지 않고 마침내 대전으로 급선회하고 만다. 31일 독일은 러시아에 대하여 총동원령 철회를 12시간의 기한부로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러시아로부터 아직회답이 없는 상태에서, 8월 1일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하였다. 더욱이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의 벨기에 중립 침범을 비난하여선전포고를 해놓고서도 스스로, 북서 프랑스 진공(進攻)을 위하여 벨기에에 침입하였고 영국은 이것을 이유로 하여 다음날(4일)대독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유럽 열강이 참가하는 유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e) 전쟁의 경과 독 일의 작전은 서쪽에서 프랑스를 먼저 굴복시키고, 이어 동쪽으로 옮겨서 러시아를 칠 계획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은개전 후 가장 먼저 북서 프랑스로 침입, 파리로 육박하였으나 1914년 9월 초순 마른(Marne)의 싸움에서 진격이저지되었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의외로 빨리 프로이센으로 침입하였으나, 독일군은 힌덴부르크 원수의 지휘하에 8월말타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을 대패시켰다(타넨베르크전투). 그러나 동서 공히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곧이어참호전(塹壕戰)으로 바뀌어, 전선은 교착(膠着)되었다. 이 사이에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연합국측으로 참전(8.23)하여, 이 기회에 동아시아 및 태평양에서의 독일의권익을 빼앗고, 특히 중국에서의 발판을 굳히려고 하였다. 한편 전전(戰前) 독일과의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는11월 2일 동맹국측으로 참전하였다. 그 때문에 유럽의 전선은 카프카스, 메소포타미아로 넓혀졌으며, 1915년 2월에서 4월에걸쳐 영 ·프 연합함대는 다르다넬스해협에서 격렬한 공격을 가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1915년 4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최초로 독가스를 영국군을 상대로 사용하였다. 동년 연합국과 동맹국 쌍방에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3국동맹에 속해 있으면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의 동향이었다. 참전의 조건에 대하여 양진영과거래하였던 이탈리아는 결국 동년 4월 ‘런던 밀약’에 의해 ‘미수복지’와 달마티아 등의 영토 획득을 약속받고 5월 23일오스트리아에 선전하고 연합국측으로 참전하였다. 이탈리아는 군사적으로는 약체이었기 때문에 그 참전이 전국(戰局)에 결정적 영향을끼치지는 못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불가리아가 동맹국 측으로 참전하여 독일 ·오스트리아군은 그 협력을 얻어 세르비아를점령하였다. 한편 1916년 8월에는 루마니아가 연합국측으로 참전하였으나, 곧 동맹군에 의하여 제압되었다. 이와 같이1915∼16년 동맹국은 동유럽 ·발칸에서 적극적 공세로 나와 전국이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서부전선에서의 교착상태는 의연타결되지 않았다. 즉, 16년 2월에서 6월에 걸쳐, 독일군은 베르덩 요새에 4회에 걸치는 대공격을 가하여 50만 명의 병사를희생하며 막대한 탄약을 소모하여 사투를 감행하였다. 그 러나 프랑스군은 페탱 장군의 지휘하에 요새를 굳게 지켰으며, 6월 말부터 영 ·프 연합군은 서쪽의솜(Somme)에서 총반격으로 나왔고, 9월 15일 영국은 최초로 18대의 전차를 병기로서 전장에 투입하였다(솜의 싸움). 약5개월에 걸친 이 전투에서 영 ·프군은 90만 명, 독일군도 60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육상에서와는 달리, 해상에서는 영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독일 해군은 대폭적 증강에도 불구하고영국에 비하여 수적으로도 열세이어서 개전 이래 북해에 갇히고 말았다. 중요한 해전으로는 1915년 12월 도거뱅크의 해전과1916년 5월 유틀란트 해전이 있었을 뿐인데, 모두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고, 영국의 해상 지배권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전쟁에서 신병기로 등장한 전차는 영국에 이어 1917년 프랑스, 1918년 독일이 각각 그 뒤를 이었으며, 주로 정찰용으로 쓰인비행선은 독일이 처음 사용하였다. f) 교전국의 국내정세 제 1차 세계대전 발발에 즈음하여, 각국 정부는 전쟁이 각각 상대방측의 공격에 의하여 야기된 정당방위의 전쟁이라고주장하고, 국민에게 그것을 믿게끔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드높은 애국심의 고양(高揚)이 엿보였다. 각국의 지도자가가장 근심한 것은 국내의 사회주의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동향이었다. 왜냐하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조직인제2인터내셔널은 그 대회 때마다 전쟁 반대결의를 하였는데, 특히 1912년의 바젤 대회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에는 혁명이라는수단으로써 반대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각국 특히, 서유럽 대국의 사회주의 정당 내부에는 기회주의나 내셔널리즘의 경향이강하여서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는 자세는 어느 정도 약화되어 있었다.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은 일부를 제외하고 종래의 슬로건에서 180도 전환하여 전쟁협력으로내달았다. 특히,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사회주의 정당이던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부의 군사예산에 찬성하고, 정부와‘성내평화(城內平和:Burgfriede)’를 맺어(1914.8.4) 전쟁협력을 약속하였으며,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그 뒤를따름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예상을 뒤엎고 장기화함으로써 국민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 전쟁 중에 예를 든다면 독일에서는 인구 6,000만 명 가운데 1,100만 명이 동원되었고, 그 중 전사자177만 명, 부상자 422만 명을 내었으니, 국민 가운데 5명에 1명이 동원되어 그 반수 이상이 사상(死傷)한 것이 되는데,이 비율은 프랑스에서 거의 같고 영국에서는 약간 떨어진다. 또한 이 전쟁은 공전의 물량(物量) 전쟁으로 이미 개전 당초, 불과1주일간의 마른의 싸움에서 탄약 100만 발, 솜의 싸움에서는 그 20배인 2,000만 발이 소모되었다. 이와 같은 전쟁 수행을위하여 각국은 자국의 경제력을 동원하고 경제 전체를 전쟁을 위한 것으로 개편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장기화하여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높아지자, 각국 정부에게는 국민의 불만을 누르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강력한지도체제를 만드는 일이 사활문제가 되었다. 이리하여 영국에서는 1916년 12월에, 로이드 조지 거국일치내각이 만들어졌고, 프랑스에서도 1917년 11월에클레망소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들 내각은 경제통제를 강화하고, 군수생산을 높이는 한편, 국내외 반전 평화운동을 탄압하였다.그러나 영 ·프 양국은 식민지에게 식량과 원료의 공급을 강제할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150만 명, 아프리카에서100만 명이나 되는 원주민을 병사 혹은 노동자로서 유럽의 전선과 공장에 투입하여, 식민지인의 희생으로써 본국민의 부담을경감시킬 수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식민지나 해외시장을 모두 빼앗긴 동맹국측에서는 물자의 부족, 국민생활의 궁핍은 그야말로 심각하였다. 더욱이 1916년 말에는 노동력 부족을 보충키 위하여, 국내에 있는 16∼60세의 남자를 탄광이나 공장에 동원하는힌덴부르크 계획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불만이 높아짐에 따라 1917년 7월 의회 다수파가 ‘화평결의’를 행한 뒤, 재상베트만 호르웨크는 강경노선의 군부와 의회 사이에 끼어 맥없이 사임하고, 이후 군부에 의한 사실상의 군사독재체제가 성립되었다.한편 같은 해 4월 사회민주당에서 ‘성내 평화’에 협력하지 않는 좌파가 따로 분열하여 독립 사회민주당을 결성함으로써 노동자의반전(反戰) 운동과 스트라이크가 번져갔다. g) 대전 중의 비밀외교 제 1차 세계대전중에 교전국은 결속을 다지고 또한 중립국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전후의 영토나 세력권의 재분배를약속하였다. 1915년 협상국측은 이탈리아에게 ‘미수복지’를 비롯하여 터키령과 아프리카의 독일령 식민지 등의 분할을 약속하였다.또,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령 마케도니아를 약속받고 동맹국측으로, 루마니아는 헝가리령 트란실바니아의 영유를 미끼로 연합국측에끌려들었다. 또, 빈사의 ‘유럽의 환자(Sick man of Europe)’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를 에워싸고 영 ·프는러시아에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양 해협의 영유를 약속하였으며, 다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1916년 5월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러시아에 흑해 동남 연안을, 프랑스에게 시리아를, 영국에는 남메소포타미아의 영유를 각각 약속하였다.또한 투르크령 서아시아에서는 아랍인의 독립운동이 고조되었는데, 영국은 1916년 초에 아랍인에게 전후 이 지방에 아랍국가 건설을약속(마크마옹 선언)하는 한편, 1917년 11월 연합국에 사는 유대인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같은 지역의 팔레스티나에 유대인의국가건설을 확약하였다(밸푸어선언). 또 인도에 대하여서도 전쟁협력의 대상(代償)으로서 전후의 자치(自治)가 약속되었으나,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끝났다. 똑같이 동맹국측에서도 독일은 대전 중 러시아령의 핀(Finn)사람, 발트 3국의 제민족,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에게독립을 약속하였으나, 그것은 모두 러시아 제국의 해체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한편,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의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에게 산둥성이나 만주, 몽골을 위시한 중국 전토에서의 일본의 권익 획득에 대한 ‘21개조 요구’를강요하고, 최후 통첩에 의하여 그 대부분을 승인케 하였다. h) 전쟁의 종결 1917 년에 제1차 세계대전은 최종 단계로 접어들었다. 독일은 같은 해 1월, 무제한 잠수함전의 개시를선언하였는데, 이것은 영국 주변의 해역에서 중립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상선을 무경고로 격침하여 식량이나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는영국을 굴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영국과 경제적으로 굳게 맺어져 있는 미국의 참전을 초래할 것이분명하였으므로, 미국 참전의 효과가 나타나기 이전에, 즉 6~8개월 이내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독일 자신의 패배가 결정적이되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독일의 잠수함은 이 싸움에서 예정을 상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영국도 중립국의 상선까지 동원하여 곤경을타개하였기 때문에 결국 무제한 잠수함전은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을 야기시켰을 뿐, 실패로 끝났다. 이리하여 패배가 결정적으로 된 독일에게 있어, 나머지 승리의 최후의 기회라고 할 러시아혁명이 같은 해3월(러시아曆 2월)에 일어났다. 러시아는 정치 ·경제 체제의 후진성 때문에 장기에 걸치는 총력전에는 견디지 못하여, 군수품·식량의 부족, 정정(政情)불안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3월혁명이 일어나 차르 정부가 쓰러졌고, 이어 11월(러시아曆10월) 혁명으로 소련 정권이 성립하여, 즉각 정전을 전(全) 교전국에게 제안하였다. 소련정부의 평화 호소와 비밀외교의 폭로는세계에 충격을 주었는데,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여 연합국측의 동요를 억제하려 하였다.그러나 러시아혁명으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선의 일각이 무너졌으며, 독일과 러시아는 같은 해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평화조약을 맺었다. 동부전선의 부담에서 해방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대공세를 폈으나 3~7월의 반복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실패로끝나자, 독일은 이 공격에서 힘이 소진되었고, 7월 18일에는 미군의 증원을 얻은 연합군이 반격으로 나왔다. 이제까지 ‘승리의평화’를 주장하여 모든 타협을 거부해 오던 군부도 이에 패배를 자인하고, 9월 말에는 연합국에게 휴전 제의를 하도록 정부에제안하였다. 이와 동시에 군부의 괴뢰내각은 쓰러지고, 의회 다수파로 이루어진 막스 폰 바덴 내각이 성립되었는데, 신내각은 즉시‘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한편,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14개조’에 의거하는 화평개입을제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이에 동맹측은 총 붕괴되어, 9월 30일 불가리아, 10월 27일 오스트리아, 30일에는오스만투르크로 항복이 잇따랐다. 독일에서도 11월 3일 킬 군항(軍港)에서 수병(水兵)폭동이 일어나 독일혁명이 일어나자, 곧이어제정(帝政)이 붕괴되고, 임시정부는 11월 11일 연합국과의 휴전조약에 조인하였다. 이리하여 5년에 걸쳐 세계의 민중에게 커다란희생을 입히고 싸웠던 제국주의 전쟁은 2개의 혁명을 유발시키고, 연합국측의 승리로서 종결되었다. i) 베르사유조약 제 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강화회의는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심의하는이 회의를 주도한 이념은 미국 대통령 T.W.윌슨의 ‘14개조’의 원칙이었으나, 이것은 세계 민중의 평화에의 원망(願望)을대표함과 동시에 세계정치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미국의 제국주의 요구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영국 ·프랑스 ·미국의 3대국이주도한 이 강화회의는 열강의 거래의 무대가 되었으며, 그러나 윌슨의 이념은, 독일에 복수하여 그 힘을 될 수 있는 한 약화시키고그 대신 스스로 패권(覇權)을 확립하려 한 영 ·프 양 제국주의국의 현실적 이해(利害) 앞에 패하여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j) 1차 세계대전의 종합적 고찰 1차 세계대전은 국가의 모든 역량이 동원된 총력전으로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기술과 자원을 얼마나 잘 뒷바침하는가에 따라 승패가 갈린 전쟁이었습니다.
협상국 측은 식민지의 원료와 노동력, 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비해 동맹국 측은 해외 식민지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고,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며, 룩셈부르크의 원광석과 루마니아의 소맥과 석유로 원료의 부족을 채웠습니다. 오히려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의 상선을 공격해 곤경에 빠뜨렸고, 영국은 중립국 상선까지 동원하면서 이를 만회했습니다.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막강한 진지를 구축하고 영국과 프랑스 군의 진격을 막아냈으며, 동부전선에서는 폴란드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남부전선에서는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세르비아를 점령함으로써 초반 승세를 잡았습니다. 러시아군은 오스트라아-헝기라군과는 잘 싸웠으나 훈련부족과 물자부족으로 독일군에게 연패했습니다. 프랑스는 독일에게 일부 영토를 점령 당해 강철생산능력의 24%와 석탄생산능력의 40%가 떨어진 상태에서 영국과 미국의 자금, 식량, 자원 원조를 받아 가며 무기 생산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영국은 전쟁 이후 모든 경제적 역량을 동원하여 군수품을 제조했는데, 군사비가 1913년 9,100 파운드에서 1918년 19억 5,600만 파운드로 증가하여 정부지출의 80%, 국민총생산의 52%를 차지했습니다. 영국은 자신뿐 아니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가 차용하는 돈에 대해 보증을 섬으로써 경제적 지원을 했고, 일례로 1917년 협상국들의 43억에 달하는 전쟁차관 가운데 88%를 영국정부가 보증했습니다. 독일은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도 능률적인 작전, 잘 갖춰진 통신망, 유리한 지형의 서부 진지 등을 토대로 전쟁을 벌여 대영제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을 거의 항복 직전까지 몰아 넣었습니다. 독일도 군수산업에 집중하기 위해 1916년 8월 힌덴부르크 계획에 돌입했는데, 경제와 사회에 대한 통제를 가했고, 정부차입이 증가했으며, 과도한 화폐의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이 야기되었습니다. 힌덴부르크 계획의 가장 큰 문제점은 농업을 경시해 농업 부문의 인력과 말, 연료 등을 군대나 군수산업으로 돌림으로써 농업생산이 급격히 줄면서 국민들에게 배급제를 실시할만큼 극심한 식량난에 처하게 했습니다. 미국의 참전과 원조는 탈진한 협상국에게 큰 힘이 되었는데, 당시 미국의 산업 잠재력은 독일의 2.5배였고, 미국은 수 많은 상선과 군함과 무기와 식량을 지원함으로써 한계상황에 이른 독일을 압박하였습니다.
1917년 미국의 참전으로 다급해진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군을 영불해엽으로 몰아내기 위해 1918년 3월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루덴도르프 대공세를 펼쳤지만 양측에 막대한 희생만 남기고 실패하였습니다. 1차 대전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충돌이었고, 독일은 모든 식민지를 잃고 영토가 축소됨으로써 몰락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를 유지하였고, 미국은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였습니다. 4.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국제정세 (1919~1942) 1차대전으로 인한 유럽의 피해는 엄청났는데, 군인 중 사망 800만명, 불구 700만명, 중경상 1500만명이었고, 500만명의 민간인이 전쟁과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물질적 피해도 극심해 프랑스, 세르비아, 폴란드 등 전쟁터였던 곳은 수십만채의 집이 파괴되고, 농촌은 약탈당했으며, 가축은 도살되고, 도로 철도 전신망 등은 엉망이 되었고, 농지는 불발탄과 지뢰로 쓸모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지리적 변화는 예전의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호엘촐레른 제국의 자리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의 국민국가가 탄생한 점입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1차대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전쟁 이후에도 식민지를 잃지 않고, 국제연맹을 주도함으로써 여전히 강대국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이 시기는 압도적인 금융외교의 시기로 독일의 배상금과 협상국의 전시부채가 맞물려 전승국과 패전국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미국과 협상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미국과 같이 금본위제를 도입하지 않고, 허술한 화폐·재정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어 경제난에 휩싸였고, 수출 촉진을 위한 경쟁적인 화폐의 평가절하는 재정적 불안과 정치적 반목을 야기시켰습니다. 유럽이 경제불안과 국가채무에 허덕이고, 미국이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자 산업국이 되면서 세계 금융의 중심은 자연히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각국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디플레이션, 금본위제 폐지, 화폐가치의 평가절하, 자본에 대한 제한조치, 국가채무에 대한 지불유예 등 비책을 사용했지만 세계무역과 신용체제에 더 큰 문제를 주었을 뿐입니다. 경제불황과 장기실업으로 각국은 극심한 정치불안에 시달렸고, 국가주의와 군국주의가 득세했습니다. 1930년대 말이 되자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파시즘 즉 전체주의 국가들이 反볼세비키주의와 反자유·자본주의 사상으로 무장하였습니다. a) 독일 폭격으로 피폐해졌던 2차대전과는 달리 1차대전 이후의 독일의 산업과 기간망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전 후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정치적 혼란과 외교적 고립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1929~1933년의 금융·상업 위기로 인기 없던 바이마르 정부가 좌초되었습니다. 1938년 독일은 정부지출의 52%, 국민총생산의 17%를 군비에 쏟아 부었는데, 이는 영국·프랑스·미국의 군사비를 합친 것보다 많은 액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이 무기산업을 일으키려면 철광석, 구리, 보크사이트, 니켈, 석유, 고무 등의 자원이 필요했는데, 이를 수입하기 위한 수출이나 외환, 식민지, 금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습니다. 독일의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은 5개 사단의 병력과 철광석, 유전과 2억달러 상당의 금과 외환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b) 일본 1930년대 들어 일본은 근대화를 이루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식량부족과 자원난, 낮은 생산성과 수출부진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세계 최대의 야마토(大和)급 군함을 제조하였고, 10척의 항공모함과 30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였습니다. 일 본의 중국 침력을 반대해 온 미국은 1938년 6월 항공자재의 ‘도덕적 금수조치’(moral embargo),다음 해의 미·일 무역협정 파기, 1941년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에 대한 석유 및 철광석의 수출금지로 경제적 어려움을가중시킵니다. c) 프랑스 프랑스는 1919년 이후 영국과 미국의 지원이 줄어들고 독일의 배상금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경제적 혼란을 겪었지만 1926년 푸앵카레(Raymond Poincare)의 통화 안정책으로 산업은 호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33년 이후 다른 국가들이 금본위제를 폐기하자 프랑화의 가치하락을 피해보려 애쓰는 바람에 프랑화의 수출 경쟁력이 떨어져 수입은 60%, 수출은 70%가 줄었습니다. 독일의 재무장에 겁먹은 프랑스는 1930년대부터 국방비 지출을 늘렸으나 경제력이 약해 절대액은 적었습니다. 독일군이 현대화를 추진하였을 때 프랑스에서 현대적인 기갑부대를 건설하자는 드골(Charles De Gaulle)의 주장은 무시되었고, 현대적인 지휘통신 체계와 항공기의 역할도 외면당했습니다. d) 영국 1차대전 이후에도 영국은 강대국이었지만 정신적 인적 물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유럽의 안정보다는 국내의 경제·사회문제나 제국관리 문제에 신경을 썼습니다. 1934년이 되자 경제는 조끔씩 회복되었지만 전통산업은 쇠퇴한 반면 항공, 자동차, 석유화학, 전기제품 등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였습니다. 영국은 군사비를 국민총생산에서 1937년 5.5%, 1939년 12.5%로 증액했지만, 숙련공과 시설 부족으로 항공기, 전차, 함정 생산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e) 소련 소련은 1차대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1914년 1억 7100만명이던 인구가 1921년 1억 3200만명으로 줄었고, 폴란드와 핀란드 등 연안국가를 잃었으며, 많은 공장과 철도와 농장을 상실했습니다. 레닌에 이어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개인농 제도를 집단농장으로 바꾸었고, 착취를 감행했는데 이로 인해 농업은 피폐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히틀러의 등장과 만주사변으로 위협을 느낀 소련은 1935년 군인원을 130만명으로 증가하였고, 많은 전차와 항공기를 생산하였으며, 기갑부대와 공수부대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f) 미국 1차대전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고 높은 경제성장을 이룬 미국은 세계 금융과 산업의 중심국이 되고, 세계 최대의 금을 보유한 채권국이 되어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주가폭락과 금융위기로 인한 1920년대 대공황을 겪고 나서는 1930년대 다른 어느 강대국보다 쇠약해졌는데 이로 인해 세계정치의 지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유럽의 정세를 악화시켰습니다. 1930년대 다른 국가들은 어느정도 정상을 회복했지만, 미국은 1937년에 재차 불어닥친 경제공황으로 폭삭 주저 앉았으며, 세계는 보호무역과 경제 블록화로 다시 긴장이 높아졌습니다. 5. 2차 세계대전 – 대영제국의 멸망 (1939~1945)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침입과 이에 대한 영국·프랑스의 대독선전에서부터, 1941년의 독일·소련 개전,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거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에 이르는 기간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두 개의 중심이 있어, 첫째, 유럽에서는 영·독전쟁, 독소전쟁, 둘째,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의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의 단계가 있다. 이들 전쟁은 각각 독자적 요인을 안고 발전했는데, 1939년 9월에 유기적인 연관에 놓여져서미·영·프·소·중의 연합국과 독·이·일의 동맹국(同盟國)이라는, 이 전쟁을 일관하는 기본적 대항 관계의 기초가 이룩되었다. 또이 전쟁에서 전체로서의 지배적인 성격은 반(反)파시즘 전쟁이었다. a) 2차 세계대전의 전사 제1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는 전반적 위기단계에 돌입하였다. 더욱이 자본주의 제국의 발전의 불균등이두드러졌고, 1929∼33년의 세계공황은 이와 같은 불균등에 근거하는 국제대립을 일거에 첨예화시켰다. 즉 자본주의 열강의블록화와 폐쇄경제적인 경향은, 자본주의국으로서 기초가 약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국내정책의 정돈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1931년 9월 중국 동북에서 침략행동을 개시, 1933년‘만주국’을 성립시켜, 이 지역에 자본주의 발전의 기반을 얻으려고 하였다. 1933년 3월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부인하자 일본은곧 연맹을 탈퇴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국내정치의 혼란 가운데에서 1933년 베르사유 체제 타파를 외치던 히틀러가 정권을장악하고 같은 해 10월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의 불만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1935년 3월에는 재군비를 선언, 1936년3월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진주하여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함과 아울러 베르사유 조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이를 본 이탈리아는1935년 10월 에티오피아에 침입하여 36년 5월에는 전토를 정복하였다. 이와 같은 침략의 확대, 전쟁 위기의 절박을 앞에 두고 반(反)파시즘, 민주주의 옹호를 주창하는 민중의반전(反戰)운동도 활발해져서, 이것을 배경으로 1935년 여름의 코민테른 제7회 대회는 인민전선의 결성을 제창, 1936년2월에는 에스파냐에, 같은 해 6월에는 프랑스에 인민전선정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는 독일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내란이벌어졌고, 중국에서는 1936년의 시안[西安]사건을 계기로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자, 일본은 이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1937년 7월 전면적인 중일전쟁을 도발하였다. 1936년 11월 독일과 일본은 방공협정(防共協定)을 체결하였고, 1937년 11월 이탈리아가 이에 가입하여 독·이 ·일 3국은 반소(反蘇)를 공공연히 외쳤으며, 이것을 구실로 하여 국내에서의 파시즘화와 대외침략을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나아가서는 똑같이 공산주의를 겁내는 미 ·영 ·프의 지배층으로부터 그 침략을 용인받으려고 하였다. 미 ·영 ·프의 지배층은일면으로는 독 ·이 ·일과 제국주의적 대립을 나타내면서도, 일면으로는 이들 3국의 창끝이 소련이나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로향해지는 한, 이와 타협한다는 경향을 보였다(宥和政策). 1937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1938년 2월 일련의 인사이동으로 나치스체제를 강화하고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合倂:안슐루스)하였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하여 전쟁의위기를 조성하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 지방을 할양케 하였다.이리하여 독일은 동 ·중부 유럽 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였으나, 한편 국제연맹 또는 집단안전보장 체제는 붕괴되어 갔다. 소련은 독 ·일의 연맹 탈퇴 후인 1934년 9월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집단안전보장정책에 노력(리트비노프 외교)하게되는데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원조조약을 맺은 소련이 뮌헨 회담에서 제외된 것은 리트비노프 외교의 기초가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더욱이 에스파냐에서는 1939년 1월 독 ·이가 원조하는 프랑코가 인민전선정부를 타도했다. 1939년 5월 소련 외상V.M.몰로토프가 취임하여 무력외교로 자국의 안전을 꾀하려 하였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하고 이어폴란드 회랑(廻廊)과 단치히(그단스크)를 요구하였다. 끝없는 히틀러의 요구에 영 ·프에서도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높아져, 양국은 폴란드에 원조를 약속하였다. 독일 ·폴란드 간의 긴장 격화와 함께 영국은 대독개전(對獨開戰)에 대비하여 소련과 교섭을 시작하지만, 한편으로는극비리에 독일과도 교섭하고 있었다. 뮌헨 회담 이래로 소련의 영 ·프에 대한 불신은 숨길 수 없게 되었고, 8월에는 영 ·소교섭이 정체되고, 이에 따라 독 ·소 교섭이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미 폴란드 공격을 결의하고 있던 히틀러는 동서에걸치는 2정면(二正面) 전쟁을 피할 필요가 있었고, 소련은 독일-폴란드전쟁이 반소(反蘇)전쟁으로 변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8월 23일의 독 ·소 불가침조약은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전혀 상반되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양국이 제휴하였기 때문만은아니다. 영 ·프의 유화정책은 결정적으로 파탄되었으며, 대소 침략을 겨냥한 일본의 대독 군사동맹교섭은 도각(倒閣)으로서끝나 버렸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파시즘에 반대해 온 유럽의 공산주의자, 소련 지지파, 인민전선 옹호자들이었다. 소련의중립을 확보한 독일은 예정대로 1939년 9월 1일 폴란드에 침입하였다. 9월 3일 영 ·프는 독일에 선전(宣戰)함으로써 제2차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b) 영독 전쟁 폴란드에 침입한 독일군은 2주일이 못 되어서 폴란드군 주력을 격파하였다. 이것은 주도한 준비뿐만 아니라, 전략공군과기갑부대의 밀접한 제휴에 의거한 전격전의 성공에 따른 것이었다. 폴란드전(戰) 종료 후 히틀러는 영 ·프에게 화평을 제의하였지만영 ·프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영 ·프는 서부전선에서 적극적 공세를 취하지 않아, 여기에서는 약 반 년 동안 전쟁다운전쟁은 볼 수 없었다(기묘한 전쟁:Phony War). 영 ·프는 독 ·불 국경에 연하여 구축된 요새 마지노선(線)에 의존하고,해상봉쇄 ·경제압박에 의하여 독일의 국력을 소모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소련은 영 ·독전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이라 하여 중립의 입장을 취하였지만, 독일의 군사력과 침략성을 겁내어국경방위선을 서쪽으로 확대하려 하였다. 1939년 9월 17일 소련군은 폴란드에 있어서의 러시아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갑자기폴란드에 침입하고 부그 강변까지 진격하여, 9월 28일 독 ·소 양국 사이에서 폴란드를 분할하였다. 이어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리투아니아와 각각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고, 1940년 7월에는 이들 3국을 소련령으로 편입하였다. 또 1940년 6월에는루마니아로부터 베사라비아 지방과 부코비나 북부를 획득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더욱이 핀란드에게는 영토의 교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자 1939년 11월 전쟁을 개시하여 1940년 3월에 간신히 그 요구를실현시켰다(소련-핀란드 전쟁). 이 때, 거의 유명무실해졌던 국제연맹은 창립 이래 최초로 소련을 제명처분하였고, 영 ·프도 핀란드 원조를 위하여병력을 파견코자 하였다. 영 ·프는 핀란드 원조를 구실로 나르비크 등 노르웨이 제항(諸港)을 확보하여, 독일 공업에 불가결한스웨덴 철광석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독일군은 선수를 쳐서, 1940년 4월 덴마크를 점령함과 동시에 노르웨이에 침입하여 영·프군을 격퇴하였다. 이 성공에는 육군장관 V.A.크비슬링 등 노르웨이 파시스트의 공모(共謀)가 기여하였는데, 크비슬링이라는이름은 이후 ‘조국을 판 사람’이라는 뜻으로 통하게 되었다. 1940 년 5월 10일 영국에서는 노르웨이에서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체임벌린 내각이 물러나고, 대독 강경론자인처칠이 노동당을 포함하는 거국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날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똑같이 중립국인 벨기에·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침입하였고, 나아가서 마지노선의 북단을 가로질러 영국 해협으로까지 진출하여 영 ·프군을 남북으로갈라놓았다. 북부에 고립된 영 ·프군 30만은 덩케르크에서 영국 본토로 기적적으로 철수하였다(덩케르크의 철수). 한편 독일군은 파리를 목표로 쇄도하여, 6월 14일 파리를 점령하였다. 이 정세를 보고 있던 이탈리아는 6월10일 갑자기 참전하여 남프랑스에 침입하였다. 프랑스에서는 6월 16일 P.레노가 사직하고 H.P.페탱이 수상이 되어, 다음날휴전을 제의하였다. 6월 22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했을 때와 똑같이 콩피에뉴의 열차 안에서 휴전협정은 조인되었다.이 결과 프랑스 본국의 약 2/3는 독일군의 점령하에 놓였고, 남부의 나머지 지역은 ‘자유지대’로서 비시(Vichy)로 옮긴페탱 정부에 위임되었다. 비시 정권은 7월 10일 제3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파쇼적인 신헌법을 공포하였다. 한편 항복과 동시에 탈출한 드골은 런던에서 대독항전(對獨抗戰)을 국민에게 호소하여 ‘자유 프랑스위원회’를결성하였다. 히틀러는 계속하여 영국 본토 상륙작전의 단행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이에 불가결한 영국 해협의 제공권(制空權)을둘러싼 전투, 즉 ‘브리튼의 싸움(Battle of Britain)’에서는 영국 공군을 제압하지 못하였고, 1940년 9월에는이 작전을 무기연기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동방제국’의 건설은 히틀러 본래의 목적이었는데, 이 실현에 의하여 군사 경제의 기반을 강화하여 영 ·미에대항코자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발칸제국에 대한 공작이 활발해졌다. 이 곳은 대소(對蘇) 공격의 전진기지로서 뿐만 아니라,터키를 거쳐 중동으로 진출하는 데에도, 더욱이 루마니아의 석유를 비롯한 전략물자의 공급지로서도 확보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히틀러는 1940년 8월, 루마니아에게 압력을 가하여 트란실바니아 지방을 헝가리에, 또한 도브루야 지방을 불가리아에 할양시켜분규중에 있는 영토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아울러 이들 3국을 독 ·이 ·일 3국동맹에 가맹시켜 기지를 확보하였다. 이 것을 본 무솔리니는 1940년 10월 돌연히 그리스에 침입하였으나, 2주간도 못되어 좌절하고 독일의 원조를요청하였다. 히틀러는 우선 그리스의 고립을 획책하고 1941년 3월 유고슬라비아를 독 ·이 ·일 3국동맹에 가맹시켰으나, 2일후에는 친서구적(親西歐的)인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으므로, 4월 유고슬라비아에 침입하여 단시일에 전토를 제압하였다. 이와 동시에그리스에도 침입하여 영국군을 격퇴하고, 더욱이 5월에는 공수부대가 크레타섬을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발칸 제국을 제압한 4월 말, 히틀러는 6월 22일을 소련에 대한 공격일로 명령하였다. 5월 10일나치스 부총통 헤스는 단신 비행기를 조정하여 영국 본토로 가서, 대소전(對蘇戰)을 위하여 영 ·독 휴전을 실현코자 하였으나무위로 끝났다. 한편 소련은 1941년 4월 13일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고 5월 6일 스탈린이 새 수상이 되어 예상 못한 사태에대처하게 되었다. c) 독소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발발 1941 년 6월 22일 독일군은 핀란드에서 흑해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소련으로 침입하였다. 북부군은 발트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로 향하였고, 중부군은 모스크바로 직진하였으며, 남부군은 우크라이나로 동진하였다. 히틀러는 소련군 주력을2개월 내에 분쇄하고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스의 자원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소련군에 대한 과소평가, 사회주의 체제의 급속한 내부붕괴의 기대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략은엄동(嚴冬)의 도래와 함께 정체되었고, 12월에는 소련군의 반공(反攻)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대소전의 단기승리를 전제로 하는히틀러의 세계전략의 좌절을 의미한다. 더욱이 독 ·소전이 발발하자 영 ·미는 즉각 소련에 대한 원조를 성명하였고, 8월 12일영 ·미가 ‘대서양헌장’으로 전쟁목적을 분명히 밝히자 소련은 즉각 이를 지지하는 등, 영 ·미 ·소의 반(反)파시즘 연합이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해 12월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1937년 7월 이래로 일본은 중일전쟁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고, 영 ·미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1940년 5월 이래 독일이 네덜란드 ·프랑스를 항복시키고 영국 본토 상륙의 기미가보이자, 일본은 1940년 9월에 독일 ·이탈리아와의 3국동맹을 체결하였고 ‘호기남진(好機南進)’의 방침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및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수출제한, 미 ·영 결속, 장제스[蔣介石]정권 원조강화로 대응하였다. 1941년 6월 독 ·소전(戰)이 시작되자, 일본에서는 재차 ‘북진론’이 대두되어 대소전의 준비가 진행(관동군특별연습)되지만, 정부로서는 ‘남진’ 방침을 결정하고 7월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하였다. 이것은 미 ·일 관계를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미국은 즉각 재미 일본 자산을 동결하였고 석유의 대일 금수를 실시하였다. 이 조치는 일본 군부의대미개전론을 자극하였고, 10월에 주전파인 도조[東條] 내각이 들어섰다.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다. 동월11일 독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이리하여 세계의 여러 전장(戰場)은 일체가 되었고, 연합국(민주주의) 대추축극(파시즘)이라는 기본적 대항관계(성격)는 명료해졌다. 1942년 1월 1일, 미 ·영 ·중 ·소 등 26개국은 ‘연합국선언’에 조인하였다. d) 대동아 공영권과 신질서 일 본은 진주만공격과 함께 말레이반도 해역에서 영국의 신예 전함 2척을 격침하여 제해권을 잡았다. 또 개전과 동시에육군은 말레이반도 ·필리핀에 상륙하여 1942년 2월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영국 극동군을 무조건 항복시켰다. 필리핀에서는1942년 1∼3월 마닐라를 위시하여 수마트라섬 ·자바섬을 점령하고, 네덜란드군을 항복시켰다. 또한 원장(援蔣) 루트의 절단,인도에 대한 대영(對英) 이간공작을 위해 미얀마에 침입하여 양곤을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남방작전은 일단락을 보았다. 하지만주전장(主戰場)인 중국전선은 교착상태가 계속되었고 중국의 항전체제는 강화되어 갔다. 1942년 1월에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건설 방침을 제시하였으나,원래 ‘남진’의 목적의 하나는 전략물자의 확보에 있었기 때문에 ‘대동아공영권’이란 유럽의 식민지지배에 대체되는 새로운 일본의식민지적 체제에 불과하였다. 일본의 침략과 가혹한 점령정책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각지에서 반일저항운동이 일어나고 이 저항을 통하여아시아의 민족해방 운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한편 히틀러는 1939∼42년에 정복한 유럽 제국을 그 인종론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재편성하고자 하였다(신질서).네덜란드와 노르웨이에는 독일 사정관(司政官)에 의한 민간정부가 설치되었지만, 언젠가는 대독일 제국으로 편입할 예정이었다.룩셈부르크 ·알자스로렌 ·단치히 등은 대독일 제국에 합병되었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는 ‘열등인종’으로 취급된 슬라브계 주민이나유대인은 강제이주, 대량 멸절(滅絶)하고, 이에 대신하여 독일인을 식민시킬 계획이었다. 점령지역의 행정권은 히틀러의친위대(SS)에게 위임되었다. 또한 히틀러의 국가 비밀경찰(게슈타포)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명령받고, 독일의 지배가미치는 모든 곳에서 유대인을 잡아들여 아우슈비츠 ·트레브링카 등의 가스실에서 420만 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군수생산 강화에 따라 심각화되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1942년 3월 노동총감 자우케르는 독일 지배하의유럽 전토에서 노동자의 강제징용을 시작하여 적어도 750만 명이 독일의 공장으로 송출되었다. 이상의 몇 가지 예에서 볼 수 있는나치스의 점령지 지배에 대하여, 민중들은 지하투쟁을 포함한 갖가지 형태로 저항하였다. 연합군의 반공(反攻)은 동 ·서에서도이러한 민중의 저항운동과 맞호응하면서 전개되었다. e) 전국의 전환 태 평양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영 ·미 회담에서 먼저 독일 타도에 전력을 다한다는 유럽 제1주의가 결정되지만, 독일타도의 전략을 놓고 영국과 소련은 대립하였다. 소련이 유럽에서의 ‘제2전선’을 요구한 데 대하여 영국은 북아프리카 작전을고집하였다. 지중해에서 중동 ·인도에 이르는 대영제국의 식민지체제를 확보하고 추축국의 ‘부드러운 아랫배’부터 공격하자는것이었다. 더욱이 1942년 여름에 북아프리카 전선은 긴박해졌다. 패배를 거듭하는 이탈리아군을 원조하러 간 롬멜 장군의기갑사단은 토브룩을 점령하고 카이로 약 100km까지 육박하였다. 1942년 10월 영국군은 반격을 시작하였고, 이에 호응하여영 ·미 연합군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독일 ·이탈리아군은 동서에서 협공을 받아 1943년 5월에 북아프리카에서완전히 소탕되었고, 이어서 영 ·미 양국은 이탈리아 진공작전을 계획한다. 이와 같이 제2전선이 연기됨으로써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의 95%를 떠맡은 것은 소련이었다. 1942년 봄 재개된독일군의 공격은 남부전선에 중점을 두었고,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에서는 독 ·소 양군의 촌토(寸土)를 다투는 전투가전개되었다. 격전 결과 포위당했던 독일군은 1943년 1월 말 항복하였는데, 이 패배가 가져다 준 영향은 매우 컸다. 민중의저항운동을 비롯하여 연합국 진영의 사기를 북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군부 내의 히틀러에 대한 불신이 커졌으며, 이탈리아는 영·미측과의 강화를 획책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독 ·소전은 히틀러에게는 ‘사활의 투쟁’이 되었다. 히틀러는 총동원체제를 취하였지만, 1943년 여름의 총공격에서 실패하였고, 이후 대세를 만회하지 못하였다. 1943 년 7월 영 ·미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자 이탈리아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와 보수파가 무솔리니를감금하고 바돌리오 내각을 성립시켰다(7월 25일). 바돌리오는 즉각 영 ·미와 교섭을 개시하여 9월 3일 무조건항복을 하였다.항복은 9월 8일 발표되었고, 남이탈리아로 피신하였던 국왕과 바돌리오 정부는 10월 13일 독일에 선전포고하였다. 히틀러는무솔리니를 구출하고 북이탈리아에 공화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1945년 5월 초까지 계속되지만, 이일종의 내란상태에서 국왕과 보수파의 권위는 상실되었다(1946년 5월, 왕제폐지). 1943년 태평양에서의 전국도 전환하였다. 서전에 성공한 일본은 제2단계 작전으로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차단하려 하였지만, 1942년 5월의 산호해 해전, 특히 같은 해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일본해군기동함대의 주력(主力)이 상실되었고, 태평양에서의 전략적 주도권은 미국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1942년 8월 미국군은과달카날섬에 상륙하였다. 격전 끝에 1943년 2월 일본군은 패퇴하였다. 이후 미국군의 반공은 격렬하여 뉴기니 ·솔로몬제도·길버트 제도 ·마셜제도로 향하여 전개되었다. 1943년 12월 1일 카이로 선언에서 미 ·영 ·중은 전후 일본의 영토 처리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1944년3월 미얀마의 일본군은 임팔 작전으로 인도에 침입하려 하였으나 7월 대패하였다. 마리아나제도에 육박하는 미군도 7월 사이판섬을점령하고, 일본 본토 공습의 기지를 얻었다.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을 위하여 10월 레이테섬에 상륙하였다.일본 해군은 전력을 다하여 레이테만의 미 함대를 격멸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중국전선에서도 1943∼44년에 중대한 변화가일어났다.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 ·신사군(新四軍)에 의하여 화북(華北)과 화중(華中)에 ‘해방구(解放區)’가 만들어짐에따라 일본군은 간신히 점(點:都市)과 선(線:鐵道)만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f) 유럽에서의 전쟁 종결 이탈리아 항복 후의 1943년 11월, 영 ·미 ·소는 제2전선의 실시에 의견이 일치하였다. 1944년 6월 6일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영 ·미 연합군은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영 ·미군의 진격과 함께 프랑스의 저항운동도활발하여져, 8월에는 파리 시민이 봉기하여 파리를 해방하고 드골을 맞아들였다. 독일에서도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가 7월20일 반(反)히틀러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미 ·영군에 호응하여 소련군의 진격도 활발하여, 1944년 가을에는소련 영토를 해방하였다. 이 러한 소련군의 진격과 이에 호응하는 지하저항전의 격화를 앞에 두고 동유럽의 동맹제국(同盟諸國)은 동요하여,잇달아 대독(對獨) 참전으로 방향전환하였다. 1944년 3월 루마니아는 소련군이 육박하자 국왕과 군부가 인민민주주의 블록에협력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9월 소련과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 불가리아는 영 ·미에 선전하고 소련에는 형식상선전하지는 않았으나, 소련이 1944년 9월 선전하자 조국전선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10월). 이어 소련군은 유고슬라비아에 들어오지만, 이 곳에서는 일찍이 저항운동이 활발하여 1942년 유고 인민해방군이결성되었고, 1943년 11월 티토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있었다. 인민해방군은 1944년 10월 베오그라드를 해방하였고, 거의자력으로 독일군을 전토에서 일소하였다. 이어서 소련군은 헝가리로 향하였다. 홀티 섭정이 휴전을 제의하자 독일은 홀티를 감금하고친독적 정부를 수립하였다. 공산당 등의 ‘헝가리 전선’은 소련군의 협력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45.1). 소련군은 1945년 2월 부다페스트를 함락시켰으며, 소련군의 진격과 함께 동유럽제국에는 저항운동을 기초로 하는새로운 정권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1944년 10월 스탈린과 처칠은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에는 소련의, 그리스에는영국의 우월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영 ·소가 대등한 입장에서 함께 티토 정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폴란드에서는 분규가 생겼다. 저항운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런던 망명정부는 반소적이라고 하여 소련은 이와단교하고, 1944년 7월 루블린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44년 8월 런던 망명정부는 무력봉기에 의한 바르샤바 해방을시도하였으나, 독일군에게 진압되었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하고, 폴란드의 두 정권의 통일과 국경에 관하여는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일단 해결을 보았다. 또한 이 회담에서는 독일 처리문제가 검토되었으며, 소련의 대일(對日)참전도결정되었다. 히틀러는 1944년 12월 서부전선 아르덴에서 일대 반격을 시도하지만 4일 만에 괴멸당하고 만다. 1945년 2월소련군은 오데르강(江), 4월 나이세강(江)에 도달하였다. 동시에 영 ·미군도 공격을 재개하여, 3월 쾰른을 점령하고라인강(江)을 건너 4월 25일 엘베강(江)의 토르고에서 소련군과 교환(交歡)하였으며, 이 날 소련군은 베를린에 돌입하였다.사태에 절망한 히틀러는 4월 30일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자살하였다. 후계자로 임명된 데니츠 제독은 군대와 민간인을 가능한 한 영 ·미 점령지구로 옮기면서 5월 7일 무조건 항복하여9일 항복이 정식 조인되었다. 5월 23일 데니츠 정부의 전원이 체포됨으로써 독일의, 제3제국은 명실공히 소멸되었다. 이탈리아전선의 독일군이 4월 29일 항복하면서 무솔리니는 4월 28일 밀라노 근교에서 살해되고,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다. g) 일본의 항복 1944년 11월 이래, 미군 폭격기 B-29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은 격화되었다. 1945년 2월 미군은 마닐라를탈환하고 이오섬[硫黃島]에 상륙하였다. 4월에는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 3개월이나 걸린 오키나와전에서는 전 도민이 동원되어희생됨으로써(9만여 명), 닥쳐올 본토 결전의 비참한 양상을 암시하였다. 7월 26일 미·영·중은 ‘포츠담선언’에서 대일(對日)처리방침을 명시함과 아울러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일본이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9일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은 이 날 대일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이르러 일본 군부도 항복을 결의하고 10일 밤 포츠담선언 수락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주전파의‘국체수호(國體守護)’ 고집으로 진통을 겪다가 일본왕의 결단으로 14일 가까스로 수락을 통고하고, 15일 일본왕은 이것을국민에게 방송하였다. 30일 미군은 일본 본토를 점령하였고, 9월 2일 도쿄만[東京灣]의 미주리호(號)에서 항복문서가 조인되면서태평양전쟁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h) 전후세계와 전후처리 제2 차 세계대전은 문자 그대로 세계를 전장(戰場)으로 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전쟁이었다. 참가국은연합국측이 49개국, 동맹국측이 8개국이며, 중립국은 스위스 등 6개국에 불과하였다. 동원병력 1억 1000만 명, 전사자2,700만 명, 민간인 희생자 2,500만 명으로, 그 중에서 독 ·소 양국의 희생이 가장 많아 소련의 전사자 1,360만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000만 명, 전인구의 약 1/10, 독일의 전사자 50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550만 명, 전인구의 약 1/10이라고 알려졌다. 일본의 전사자는 185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50만 명,전인구의 약 1/40 이다. 이 개수(槪數)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동원병력수는 약 2배,전사자는 약 5배, 민간인 희생자는 약 50배이다. 요컨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민간인의 희생자가 현저히 많다. 이것은 나치스의 인종론적 절멸(絶滅)정책에 유래한다.민간인의 희생자 가운데 약 500만 명은 유대인인데 이것은 나치스 지배하의 유대인 총수의 약 70%라고 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현대의 전쟁이 민간인을 제외하지 않은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살륙)전쟁으로 된 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전비(戰費),파괴된 재산을 오늘날의 물가에 맞추어 재평가한다면 너무나 방대하여서 아마도 계산할 수가 없을 정도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최초부터 전쟁 책임의 소재가 명료하였다는 데 있다. 독일 ·이탈리아·일본은 국내에서는 파시즘화를 추진하면서 대외침략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연합국은 첫째로는 전쟁범죄인을단죄하고(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극동 국제군사재판), 둘째로는 일본 ·독일을 점령하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민주화를꾀하고자 하였다. 확실히 파시즘에 대항하는 연합국의 공통된 슬로건은 ‘민주주의’였으나, 자본주의국과 사회주의국과는 그 이해에 차이가있었다. 이 차이는 일본 ·독일의 처리를 에워싸고 양 체제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하였다.그 배경을 살펴보면, 최대의 피해를 받고대독전쟁 승리에 최대의 기여를 하였던 소련은, 내외의 사회주의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국제적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소련의 지도하에동유럽 제국은 인민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정치체제를 취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오랜 대일 항전에 견디어 낸 중화민국이 5대국의 하나가 되었으나, 국공대립(國共對立)은 내전으로발전하여 1949년 10월 중국정권의 성립을 보았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의 패퇴와 동시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는베트남공화국,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에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성립되지만, 종전의 식민국인 프랑스 ·네덜란드는 이것을 무력으로진압하려 하였다. 하지만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중동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민족해방운동은 고조되어 잇달아 독립하였다. 이리하여 패전국 일본 ·이탈리아는 물론, 전승국 영국 ·프랑스도 뒤이어 식민지를 잃었다. 더욱이 영국에는노동당내각이 성립되었고,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저항운동 가운데에서 공산당의 힘이 신장되었다. 미국만이 ‘민주주의 병기창’으로서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최대최강의 자본주의국으로서 세계를 지도하기에 이르렀다. i) 양극체제의 대립과 평화조약 미 ·소를 정점으로 하는 양 체제의 대립이 격화, 냉전화(冷戰化)함으로써 추축국과의 평화조약 체결은 용이하지않았다. 1946년 7~10월의 파리 평화회의에서는 트리에스테(Trieste)문제를 둘러싸고 미 ·소가 대립하였으나, 1947년2월 10일 간신히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에 대한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잃었고,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에게 영토를 할양하였다. 트리에스테는국제연합 통치하의 자유지역이 되었으나, 1954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 분할되어 일단 해결을 보았다. 루마니아는 1940년의소련에의 영토할양을 재확인하였으나 트란실바니아지방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헝가리의 국경은 거의 1938년의 국경으로 되었고,불가리아는 도브루자 남부지방의 영유가 인정되어 41년의 국경을 거의 유지하였다. 핀란드에 대하여는 1939년의 소련-핀란드전쟁에의한 소련에의 영토할양이 인정되었다. 독일처리방침은 1945년 8월 2일 포츠담 의정서에서 명확히 되었으나 그 해석을 에워싸고 미 ·소는 매사에대립하여, 1947년 말의 런던 4국 외상회담은 결렬되었다. 1949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수립되었고, 미 ·영 ·프는 1952년 5월 서독과 ‘평화확정조약’을 맺었으며 1954년 10월 파리협정에서 서독의 주권을회복하고 사실상의 단독강화를 체결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1953년 5월 동독에 자립권을 주었고, 1955년 9월 동독의주권을 회복하였다. 이리하여 두 개의 독일은 고정화되었다. 1945년 7월 26일의 대일 포츠담선언에 명시되었으나, 대일 강화문제에서도 미 ·소는 일치되지 않았으며, 또일본 여론도 분열하였다. 그러나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는 조인을 거부하였다. 중국은 초청되지 않고 인도 ·미얀마 ·유고슬라비아는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중화민국 ·인도·미얀마와는 별도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6. 미·소 냉전시대 (1945~1990) 2차 대전 당시 히틀러는 영국, 소련, 미국 등 강대국과 한꺼번에 전쟁을 함으로써 전술과 무기면에서는 우위에 있었으나 생산력과 인력, 보급이 뒷받침 하지 못함으로써 패망하였습니다. a) 전 후 미국 2차대전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 등 과거 유럽 강대국은 산업이 피폐해지고 거의 모든 식민지를 잃음으로써 약소국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전쟁 종결 당시 미국의 금 보유고는 200억달러로 세계 금보유고의 2/3에 달했고, 세계 제조업 생산의 절반을 담당했으며, 세계 수출의 1/3을 차지하였습니다. 미국은 전후 자유무역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새로운 질서를 확립했는데, 1942~1946년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등 국제협정을 마련했고,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이 체결되었습니다. 자유경쟁 체제는 미국과 같이 경쟁력이 강한 나라에는 유리하였지만, 2차 대전을 겪어 폐허가 되고 빚더미에 올라 앉은 나라에는 불리하였습니다. b) 전 후 소련 2차대전 당시 독일군 506개 사단을 격파하였지만 자국민 2000만명 이상이 희생되어 전쟁을 정면으로 치루어냈던 소련은 전 후 동유럽과 만주, 한반도 등에 군대를 파견해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소련은 동유럽에 폴란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의 위성국을 세워 서방세력을 견제했고, 극동에서 만주, 사할린, 북한 등을 신속히 점령함으로써 러·일전쟁의 패배를 설욕했습니다. 소련은 1945~1950년 경제성장을 위해 국민생활과 농업을 희생시키면서 중공업과 산업발전에 총력을 기울여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리게 되었습니다. c) 냉전 (Cold War)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사회주의 진영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는데 물리적인 충돌 없이도 전쟁상황 같은 첨예한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고 하여 ‘냉전’(cold war)이라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냉전의 이면에는 미국 군산 복합체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군사비 지출(단위 1억달러, 출처:강대국의 흥망) 미 국의 군사비는 한국전쟁(1950) 발발 이후 급격히 늘었으며, 1953년 이후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군산복합체가미국의 사회와 경제를 망치기 전에 이를 통제해야겠다는 노력이 반영되었지만, 1962년 쿠바 위기로 다시 증액되었고 1966년에는베트남 전쟁으로 상승했습니다.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1950년대 소련이 장거리 폭격기를 보유하자 미국의 핵 독점시대는 막을 내리고 양국간의 핵무기 경쟁이 일어났습니다.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소련은 잠수함에서 핵 미사일을 발사하는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온갖 종류의 전술 핵무기와 단거리 로킷을 제조하였습니다. 미· 소 양국은 상대방을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상호확증파괴(MAD, Mutually AssuredDestruction) 상태를 유지했는데, 우발적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핫라인(Hot-Line)을 설치했고, 1963년 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소련은 해외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해군력을 강화했으며, 리비아의 카다피와 그라나다의 좌익정권을 지원하고, 이디오피아, 모잠비크, 기니, 콩고 등 서아프리카에 공산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엄청난 자원과 인력을 쏟아 붓고도 실패했고, 국론은 분열되었으며, 방위비도 삭감되었습니다. 미국의 도전에 자극 받은 소련은 경제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방과 과학·기술 분야에 예산을 집중했고, 아프카니스탄 전쟁의 실패까지 겹쳐 국가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소련은 중공업과 군수산업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투입했고, 개인소비를 억제하는 경제체제와 산업의 비효율성, 낮은 농업 생산성 등의 문제가 쌓여 자본주의 국가보다 경쟁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국제 전략 연구소’(IISS)가 밝힌 미국과 소련의 전략 핵탄두 보유수 (1986) C. 대영제국의 흥망 로마제국에 이어 17~19세기에 결쳐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했던 대영제국의 흥망사는 이 시대에도 많은 교훈을 줍니다. 1. 대영제국의 개관 대영제국은 한 때 세계 육지 면적의 1/4, 세계 인구의 1/6을 지배하였으며, 세계 산업과 금융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1899~1902)으로 제국주의의 자성론이 일었고, 1,2차 세계대전으로 국력을 거의 소모하였으며, 미국과의 수에즈 운하 분쟁(1956)으로 제국주의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영 국은 제국 초창기에는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에 바탕을 둔 중상주의적인 팽창을 했고, 제국 중반기인 19세기에는 강한산업 경쟁력으로 자유무역에 바탕을 둔 번영기를 가졌으며, 제국 말기에는 독일, 프랑스 등과 과잉 제국주의 경쟁을 벌이다가보호무역과 경제 블록화를 실행해 필연적으로 세계전쟁을 유발하였습니다. 대영제국이 멸망한 결정적인 원인은 1,2차 세계대전때문인데 전쟁기간동안 국민소득의 60% 이상을 전비로 쏟아부었고, 영국 재무부와 중앙은행은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과도한 군비지출이 강대국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는 것은 이전 단원에서도 지적한 바 있는데, 영국이 오랫동안 제국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이 전성기인 19세기에도 국민생산의 2%만 군사비로 지출했다는 점입니다. 2.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스페인 무적함대 영국도 한 때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1567년 스페인 정예 육군 5만명이 명장 알바 공작의 인솔 하에 네델란드 프로테스탄트들의 반 스페인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 건너편인 네델란드에 진주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영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네델란드의 반군을 지원하며, 해적을 이용하여 스페인군의 보급을 방해하는 등의 간접적인 전략을 사용합니다. 대영제국의 기초를 이룬 것은 다름 아닌 풍부한 학식과 차분한 인품을 갖춘 엘리트들인데 이들은 폭 넓은 정보수집과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약점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3. 대영제국의 위기 영국은 19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1850년부터 1879년까지 영국의 대외무역은 3배나 신장되었습니다 1820년대까지 보호무역을 시행했던 영국은 경제패권을 확립하여 공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자 해외 시장확보를 위해 자유무역의 기치를 들고 외국에 시장개방을 요구하였습니다. 19세기 말의 20년 동안 세계를 덮은 경제불황은 각 국을 보호무역주의로 몰아 넣었고, 면제품 등 영국의 수출은 대폭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영국의 노력은 제국의 과잉 확대를 초래하게 되었으며, 광범위한 지역의 군사적 개입에 따른 비용이 증가되었고, 고전적인 제국의 피폐로 연결되었습니다. 4. 대영제국의 수치 – 보어 전쟁 남아프리카 전쟁이라고도 하는 보어전쟁은 1899~1902년 영국과 트란스발공화국이 벌인 전쟁입니다. 19 세기 후반 남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이 케이프 식민지를 기지로 하여 세력을 확대시켰고, 그 북방에는 네덜란드인의자손인 보어인이 건설한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예자유국이 있었다. 1867년 트란스발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오렌지강변에서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영국은 이 지역에서의 지배권 확립을 기도하여, 많은 영국인을 이 지방으로 옮겨 들어가게 하였다. 따라서영국인과 보어인 사이에 마찰이 생겨, 1881∼84년 제1차 전쟁이 일어났다. 그 후 트란스발은 영국과 대항하기 위하여,오렌예자유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양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1899년 10월 마침내 양측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1900년 6월 영국군은 트란스발에 침입, 점령하고 9월 트란스발공화국의 영국병합을 선언하였다. 오렌예자유국도전쟁이 개시되자 트란스발 측에 가담하여 참전하였으나, 2월 영국군은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5월에 오렌예자유국의 영국병합을선언하였다. 그러나 연합보어군은 그 후 2년 동안 게릴라전을 전개, 반항을 계속하여 영국군을 괴롭혔으며 두 나라의 대부분을 다시해방시키고, 영국령까지 진격하여 들어갔다. 이에 영국은 철저한 전멸전법을 취하여, 인구 50만 명에 총동원 병력 약 7만보어인을 정복하기 위하여, 45만 군인을 동원하여 보어인의 전답 ·가옥을 불사르고, 21만의 비전투원을 강제적으로 집단수용소에집어 넣었다. 이 강제수용소의 설비 ·대우는 최악의 상태로서 총 약 2만의 사망자를 내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민족전멸의 위기에 봉착하자, 1902년 마침내 보어인은 영국에 굴복하고, 영국은 두 나라를 영국령 식민지로함으로써 남아프리카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희생도 매우 컸다. 영국은 이 전쟁을 통하여 세계 여론의 공격을 받았고,국제적으로도 ‘영광의 고립’ 정책을 버려야 하였다. 국내에서도 반전운동이 고조되어 자유당의 로이드조지는 이때에 제국주의 정책의반대론자로 활동했으며, 노동당 결성이 촉진되었다. 또한 남아프리카에서도 보어인의 생활부흥을 위하여 300만 파운드의 보조금을내주어야 하였고, 그들의 자치를 인정해야 했다. <두산 백과사전>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영국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끌어 모은 50만 대군으로 총력전을 펼치고도 3만5천명의 보어군과 오랫동안 접전을 벌렸고, 야만적인 민간인 학대는 국제적인 비난과 제국주의에 대한 영국내 자성론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전쟁의 시작은 영국의 세실 로즈 일파가 영국인 중에서 범법집단을 군사적으로 조직하여 트란스발 공화국을 침공해 정부를 타도하고 금광의 지배를 꾀한 제국주의적 음모사건입니다. 1899년 10월 보어전쟁의 개전과 함께 영국은 불러 대장의 지휘 하에 3개 사단 8만명의 병력을 남아프리카에 파견하였는데 이는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장군이 지휘한 영국군의 두배 이상 되는 병력입니다. 영국 육군 최고의 명장이었던 불러는 경질되었고, 수 많은 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70세의 로버츠 원수가 지휘를 맡게 되었습니다. 키츠너는 조직화된 병력의 집중 배치와 계통적인 보급체계를 중시하여 압도적인 화력으로 정면돌파를 실시하는 세계대전형 군인이었는데, 훗날 1차대전에서는 징병제를 도입해 거대육군을 창설하고 총력전의 선두에 서게 됩니다. 영국군은 보어군에 대한 민중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농촌의 부녀자들을 일정한 공간에 한사람씩 수용하는 콘센트레이션 캠프(concentration camp)에 강제 수용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체임벌린과 세실 로즈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영국은 전 세계로부터거대한 증오를 사고 있습니다. 저는 영국이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를 불 태워 죽인 이래 이만큼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을 저지른적인 없다고 확신합니다. 부 도덕한 전쟁에 대해 전쟁을 찬동하는 측은 좋든 싫든 우리 조국의 전쟁이라는 ‘애국주의’와 배타적 맹목적 광신적애국주의이자 대외 강경론인 ‘징고이즘’(jingoism), 인류 평등을 위한 전쟁이라는 호전론(好戰論) 등으로 옹호하였습니다. 이러한 균열은 자유당의 붕괴와 노동당의 대두라는 20세기 영국 정치사의 대전환의 계기가 되었고, 지식인들 가운데 냉소주의를 심었으며, 이 후 스패인 내전과 수에즈 전쟁에서의 국론 분열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역사가 테일러는 보어 전쟁의 결과 보어인의 독립이 무산된 것 이상으로 영국인의 ‘제국에의 신념’에 대한 정신적인 권위가 실추된 것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19 세기 영국의 전성기인 빅토리아 여왕의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Age)에 이은 20세기 영국의쇠퇴기인 에드워드 7세의 ‘에드워드 시대’(Edwardian Age)는 근엄했던 빅토리아와 방탕했던 에드워드의 성격만큼이나극명하게 다릅니다. 5. 미국의 도전 영국은 1763년 프랑스와의 7년 전쟁의 승리로 북미 대륙에서 프랑스 세력을 일소하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앵글로색슨의 대제국을 세웠습니다. 새로 태어난 미국 공화국은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였으며, 이후로 1세기 동안 영국과 대립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캐나다 국경문제, 파나마 운하 구상, 영해군의 전시 봉쇄권 등을 놓고 대립했는데, 미국은 영국과의 힘의 격차를 인정하면서도 굴복하지는 않는 외교를 펼쳤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30년만에 공업생산과 무역액이 두 배로 증가될 정도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고, 인구도 급격히 늘었습니다. 1895년 미국이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영국령 기아나의 국경분쟁 때에 먼로 선언을 내세워 자신의 강제적 중재권을 인정해 줄 것을 영국에 요청하였으나 영국이 이를 일축함으로써 양국은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치닫기도 했습니다. 이는 영국에 당시 급격히 성장하는 독일을 주적(主敵)으로 규정하고 세계 각지로부터 군대를 철수시켜 유럽에 집중시켰기 때문에 프랑스나 러시아, 미국에 대해 양보해 협상을 맺는 외교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독일의 위협을 과대 평가하고 독일과의 공존 가능성을 포기하고 억지와 봉쇄에만 초점을 둠으로써 1차세계대전 이란 재앙을 맞게 되었습니다. 1차대전으로 영국의 국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미국으로부터는 거의 도움을 받지 못했으며,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채무국으로 전락해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6. 대영제국 몰락의 내부적 원인 당시에도 현재와 같은 자유무역으로 각국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영국은 신흥 공업국에 대한 가격과 품질의 우위를 점점 잃어 버리고 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일부 개혁파들이 제조업의 기반유지와 관세수입에 의한 재원확보를 위해 보호무역을 주창하였으나, 자유무역을 신봉하는 보수파에 밀려 실행되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거대 토지를 소유한 귀족 중심의 사회였는데, 사회개혁을 위한 재원 조달을 위해서는 세제(稅制)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지만 의회를 장악한 토지 귀족이 스스로 개혁을 이루기는 불가능하였습니다. 1906년 구성된 자유당 내각에서 보어전쟁의 반대와 복지사회의 이상을 부르짖었던 로이드 조지가 재무장관에 취임해 1910년 ‘민중 예산’(peoples budget)에 의한 사회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7. 영국의 대참사 – 1차 세계대전 (1914~1918)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 군인의 전사자는 무려 90만명으로 2차 세계대전 전사자 40만명의 두배가 넘습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0년 전부터 독일의 강대국화와 해외진출을 대영제국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 들이고 군사 외교 경제적 수단을 통한 억제와 압박으로 독일을 유럽 안으로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전쟁은 철조망과 참호로 대치한 지루한 참호전이었고, 공격하는 쪽은 기관총 세례를 받았고, 방어하는 쪽은 포탄 세례를 받으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유럽 전장의 교착 상태를 뚫기 위해 영국은 1916년 6월 솜 전투에서 25개 사단을 투입하는 대공세를 펼쳤는데, 수십만명의 보병이 광대한 적진을 향해 일제히 돌진한 무모한 전술은 첫날 7만명의 사상자를 낳았습니다. 8. 아라비아의 로렌스 1차 세계대전 후에도 영국은 모든 식민지를 유지하고 독일 식민지까지 취합함으로써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속으로는 인적, 재정적, 정신적으로 골병이 들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 석유수요가 높아겼기 때문에 석유자원을 확보하고, 인도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은 중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영화 ‘아리비아의 로렌스’로도 유명한 토머스 애드워드 로렌스는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고고학자 출신으로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카이로 주둔 육군 정보부의 정보장교로 근무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1916년 연락장교로 아라비아 반도 서부의 헤자즈 지방에 파견된 로렌스는 그곳에서 후사인의 아들 파이살과 역사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그 후 로렌스의 아랍 군단은 수에즈 운하에서 가자로 진출하여, 아라비아의 정규군 우익과 합류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수복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영국은 한편 프랑스와 아랍인 지역을 분할하기로 밀약한 상태였는데, 이를 안 로렌스는 도리상 중동지역을 아랍인들에게 돌려 주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낙타와 말로 구성된 로렌스의 부대는 트럭과 지프를 타고 다니는 영국군을 앞지르기 위해 투르크 군의 저항이 적은 시리아 사막을 횡단해 영국군보다 하루 먼저 다마스커스 입성에 성공합니다. 로렌스의 아랍 군단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기 위해 시리아 사막을 달리고 있을 때 로이드 조지 내각의 외무장관인 벨푸어는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중동의 석유와 수에즈 운하를 손에 넣기 위해 벨푸어는 아랍에 독립국가 건설을 원치 않았고, 유대인 국가 건설이 제국의 유지라는 영국의 전 후 구상에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양식은 벨푸어와 처칠 그리고 권력의 사제로 변신한 로이드 조지 등의 제국 유지에 대한 집념에서 나온 것으로 서로 모순된 것을 뒤섞어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주도권을 쥐는 앵글로 색슨의 행동양식이 나타납니다. 현재 중동지역 지도 1919년 인도에서 출정한 10만명의 영국-인도군은 페르시아만의 쿠웨이트에 상륙해서 이라크 평원을 북상하여 바그다드를 점령했고, 다시 북상하여 키르크크와 모술의 유전지대를 확보함으로써 페르시아만과 이라크 전역을 확보하였습니다. 1919년 4월 벨푸어 선언에 의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이주가 된 다음부터 지금까지 80년 이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의 분쟁과 대립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9. 잠에서 깨어난 식민지들 1919년 4월에 북인도 암리차르에서 영국군이 수천명의 무저항 인도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은 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씻을 수 없는 잔혹함과 오점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간디와 네루의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인도는 영국에 있어서 자원과 시장을 제공하는 생명선과도 같은 존재였는데, 1차 대전 중에 출정한 군인 390만명 중 150만명이 인도 식민정부의 자체 비용에 의해 동원되었습니다. 영국이 무려 700년동안 오직 무력으로 지배해온 아일랜드도 1919년 자치권을 획들하기 위한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이후 영국 왕권의 부정과 완전 독립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도취했던 영국은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독립열기와 반란에 휩싸였고, 과연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의 나약함을 느끼면서도 깨끗하게 화해하지 않는, 지배에 대한 집념을 보여 주는데, 로렌스에게 환멸을 심어 주었던 속임수적인 대응 방식이 대영제국의 ‘유화’정책입니다. 10. 대영제국의 말로 – 2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성장에 대한 영국의 무리한 억압으로 발발하였다면, 2차 세계대전은 피폐해진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무리한 전쟁 배상금 요구로 발발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집권하자 경제부흥과 함께 금지된 재무장을 실시했고, 국가의 모든 자원을 군사력에 집중한 군국주의적인 정책은 단기간 내에 독일을 다시 세계 최고의 군사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영국에 비해 영불 해협을 무사히 건널 해군력이 없었던 독일은 우세한 공군력을 바탕으로 런던을 비롯한 영국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지만 이는 오히려 영국이 군수품을 생산할 시간을 벌어 주었습니다. 스탈린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허약해진 소련군은 독일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순식간에 밀려 모스크바 앞까지 진격을 허용했지만 추운 겨울과 대대적인 반격으로 방어에 성공합니다. 독일이 소련과 싸우고 있는 동안 영국은 직접 대응을 피하고 주로 중동에서 롬멜의 기갑사단과 전쟁을 벌여 보급이 빈약한 롬멜 사단을 물량전으로 물리치고 이탈리아로 진격하게 됩니다.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영국은 엄청난 물직적 피해를 입었고, 국가의 모든 자원을 투입한 나머지 빚더미에 올랐으며, 거의 모든 식민지를 잃고 미국에 제국의 자리를 물려 주게 됩니다. 1945년 5월 8일 처칠은 하원에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전하고 환희에 빠졌지만 수주일 뒤 치루어진 총선에서 패배해 권좌에서 물러났고, 1960년 1월 사망합니다. ‘무기 대여법’의 규정에는 영국이 미국으로부터 제공 받은 물자와 비슷한 제품은 어떤 것도 다른 국가로 수출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영국 공업제품의 수출을 막아 영국 경제를 망가뜨린 독소로 작용합니다. 11. 대영제국의 종말 – 인도에서의 퇴진과 수에즈 운하 사건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약 11억 파운드의 해외 자산을 모두 잃었고,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7억 6천만 파운드였던 대외채무는 33억 파운드로 늘어났습니다. (1938년 영국의 국민 총소득은 46억 파운드였습니다.) 1945 년 영국과 미국의 재무 협상에서 미국이 제시한 조건은 37억 5천만 달러를 2%의 이자로 대여해 주는 대신대영제국의 식민지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이른바 ‘제국 특혜관세’(imperial preferential tariff) 제도를철폐하여 미국에 수출문호를 개방하고, 파운드 대 달러 교환율을 1939년 당시의 4달러 3센트라는 고율로 정하고, 조속한 시기에파운드의 교환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영국은 1945년 12월 12개조로 된 영미 차관협정을 조인하였는데, 이 협정만큼 미국의 압도적인 우위와 영·미간의 지위 역전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 과정 중에 인상적인 것은 미국의 대영제국의 해체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계획적이고 전략적이었다는 것입니다. 1 차 대전 이후 피폐해진 독일의 재건을 돕고, 히틀러가 재무장 하는데 가장 큰 협력을 아끼지 않은 것이 미국의록펠러를 비록한 금융세력이란 보면 어쩌면 2차 세계대전은 대영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미국의 치밀한 연극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영국은 전후에도 세계 각지에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에 군사비를 줄일 수 없었고, 1946년의 군사비는 16억 파운드로 1938년의 7배에 달했습니다.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미얀마 국경까지 다가온 1942년 인도 전역에서 발생한 반영 폭동은 영국인으로 하여금 인도에 대한 지배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것을 느끼게 했고, 미국마저 인도의 독립을 요구하며 압력을 가했습니다. 일본군의 인도 육박을 간신히 격퇴하였지만 인도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무력충돌은 점차 심각해졌고, 식민정부의 관료와 경찰은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1947 년 2월 20일 영국 수상 애틀리는 ‘영국 정부는 1948년 6월까지 인도에서 철수하고, 정권을 인도에게양도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인도의 불신을 해소함과 동시에 ‘최후의 총독’이란 단서를 붙혀 46세의 마운트배튼을 임명합니다. 모엇보다도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였던 그는 영국 왕족 신분이고, 국경을 초월한 인류의 평등을 신봉하는 진보적 지도자라는 점에서 최후의 인도 총독으로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종말을 장식하기에 알맞은 인물이었습니다. 8월 15일 이전의 초여름 동안 인도 봄베이 항에서 장대한 군악대가 연주하는 동안 친영 인도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영국 병사를 가득 실은 수송선이 위풍을 간직한 채 서서히 부두에서 멀어지는 모습은 품위의 승리였습니다. 미얀마와 스리랑카에서도 철수한 영국은 어렵게 점령한 팔레스타인에서도 철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반영 테러를 계속하는 유대인 세력과 전투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세력과의 유격전으로 탈진한 영국군은 아랍인의 불신과 모멸의 시선을 받았고, 국제 여론의 비웃음 거리가 되었으며, 본국은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신음하였습니다. 한편 1956년 이집트의 새로운 지도자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는데, 수에즈 운하야말로 1875년 디즈레일리가 사들인 이래 오랫동안 제국의 생명선이 된 중요한 권익이었습니다. 단독으로 행동하기를 주저한 영국은 프랑스를 충동질하여 이스라엘을 포섭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면 그 충돌에 끼어 들어 정전을 강제하기 위한 다국적군으로 영국-프랑스군을 수에즈 운하에 파견하는 방법에 열중합니다. 특히 미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제국주의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국제도덕의 근본을 짓밟은 영국의 독단적 행동에 대해 워싱턴의 반발은 격렬했습니다. 미국의 비난에 이어 수련 흐루시초프는 영국 본토에 대한 미사일 공격의 위협마저 내비침으로써 영국은 미·소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더 이상 단독으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 뒤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 남아 있던 영국령 식민지의 독립사태가 이어졌는데, 영국은 이제 현실을 직시하고 순수히 물러나게 됩니다. D. 미국 제국주의의 역사의 특징 1. 미국 제국주의의 역사 미 국은 1840년대부터 1890년대에 이르는 약 40년 동안 노예문제로 일어난 50년대의 위기와 남북전쟁, 전후의남부의 재건과 대서부의 개척, 그리고 혁신주의적 사회개혁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었기 때문에 북미대륙의 경계를 넘어 해외로 국력을진출시키는 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습니다. 이 기간 유럽의 강대국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등의 후진지역에 대한 세력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제국주의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1890년대 이전에 해외진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a) 소극적인 해외진출 그리고 미국인이 대거 진출하고 있는 하와이는 1875년에 제3국이 이 지역을 합병할 수 없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어 1878년에는 태평양무역의 중계요지인 사모아군도 내에 해군기지를 설치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였습니다. b) 적극적인 해외진출론의 대두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유럽열강의 제국주의 진출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회학자인 존 피스크는 우수한 앵글로색슨족의 언어 정치 종교제도가 전세계에 전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해군력의 필요성을 주장한 사람은 알프래드 머핸(Alfred T. Mahan)이었습니다. 그 는 이어 1897년에 “제해권과 미국의 이해, 현재와 미래(The Interest of American inSea Power :Present and Future)’라는 저서를 통해 카리브해를 세력범위로 해야 하며, 태평양의 제해권을잡고 극동에 있어서의 미국의 입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이러한 머핸의 이론은 해외진출을 갈망하는 팽창주의자들에게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은 파나마 운하건설, 캐나다 합병,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요구하는 대정책(Large Policy)을 내세웠으며, 공화당은 1896년 선거에서 그정책을 정강으로 채택하였습니다. c) 미·스페인전쟁 -제국주의로의 진입 미국의 쿠바간섭은 인도주의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 음에 클리브랜드 대통령이나 그를 계승한 맥킨리 대통령은 다 같이 쿠바사태를 신중히 대처하려 하였으나 1898년1월에 허어스트계(Hearst) 신문들은 주미 스페인 대사가 맥킨리 대통령을 모욕하는 사신을 공표하여 미국민의 감정을자극하였으며, 2월에는 미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아바나에 파견된 메인호(Maine)가 원인 불명의 폭팔 사건으로 침몰하여266명의 장병이 생명을 잃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전선을 확대하여 쿠바에 인접한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와 태평양의 구암(Guam)을 정복하고 다시 필리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스페인의 제의로 12월에 강화조약(파리조약)이 체결되어 쿠바의 독립이 승인되었고, 배상으로서 미국은 푸에르토리코와 구암을 양도받았으며, 필리핀에 대하여서는 2천만 달러에 매수하였습니다. c)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 그러므로 미국은 중국의 분할을 막으려 했고, 그에 따라 1899년 9월에 국무장관 존 헤이는 제1차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각국의 회답은 조건부였으나 헤이는 각국이 전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1900년 3월에 문호개방원칙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제1차의 경우와 같이 각국에 회답을 요청하지는 않았으나 각국은 이 통첩에 동의한다는 회답을 보내 왔습니다. d) 파나마 운하문제 그러나 파나마지역에서 1903년에 콜롬비아정부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군을 도와 공화국을 수립케 하였고, 콜롬비아는 파나마를 잃은 대가로 2천 5백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e) 베네수엘라 문제 f) 멕시코 내전 개입 그러나 카란자 정부는 반미주의자이며 빈민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판쵸 빌라(Pancho Villa)의 반란에 직면하였습니다. 그 외에 미국의 태프트 정권은 1912년에 니카라과에, 그리고 1915년에 윌슨은 아이티에 군대를 파견하여 친미적인 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2. 미 제국주의의 특징 고전적 제국주의가 국가의 이익을 위하고 무력적으로 식민지를 정복했다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제국주의는 대기업의 이익을 위하고 시장 개방을 통해 경제적으로 후진 국가를 예속시킵니다. 911테러 이후에는 미국의 패권에 순응하지 않는 국가에 대해 무력을 통한 침공과 점령을 시행함으로써 경제적 영향력의 감쇠를 군사력으로 상쇄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1958년 이란의 모사테크 체제가 석유자원의 국유화를 통해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자 미국은 쿠테타를 일으켜 친미 왕정을 복구하였습니다. 미국은 1954년 토지개혁을 주도한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하고 군부정권을 세웠으며, 1961년 쿠바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침공과 카스트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명분 없는 경제봉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1998년 선거로 집권하여 개혁을 단행해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과감히 반기를 들었고 미국이 끈질기게 요구해 온 석유기업의 민영화를 차단하는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전시 중의 학살, 강간 등 전쟁범죄에 대해 처리할 수 있는 기구로 2002년 4월 66개국이 인준함으로써 발족되었지만, 미국에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3. CIA – 미 제국주의의 첨병 미국은 겉으로는 세계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의로운 국가를 표방하기 때문에 제국주의적인 더러운 일은 주로 CIA가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CIA는 냉전 분위기가 시작된 1947년 7월 트루먼 정권 때 창설되었는데, 국가안보국(NSC)을 통해 대통령이 직접 책임을 지는 기구로 탄생합니다. CIA 는 주로 제 3세계에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비밀활동을 수행해 왔는데, NSC 비밀명령 10/2 문서에의하면 비밀활동은 프로파간다(선동), 경제전, 사보타주와 반사보타주, 파괴와 철수작전 등을 포함하는 혁명 예방조지, 적대국 내의지하 게릴라에 대한 지원 등을 포함한 반미정권 붕괴, 반공세력 지원 등을 의미하고 이 외에 요인 암살 등이 실제적으로추가되었는데 이 내용은 미 의회 청문회에서 밝혀져 미국 내 여론을 경악시키기도 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NSC 10/2에 미국 정부의 정치공작 비밀개입을 은폐하는 조항이 들어 있다는 점인데, 이 조항은 CIA의 제3세계 정치공작에 대해 미국의 개입을 불분명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왔습니다. 특이한 사항은 CIA가 독일 나치의 대소 첩보망을 고스란히 넘겨 받아 냉전정책의 수행에 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CIA가 약물실험을 정책적 관심사로 삼은 것은 나치 독일의 인체 생화학 실험 결과를 인수하여 1953년 MK-Ultra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부터입니다. CIA가 제3세계 비밀공작 활동을 추진한 대표적인 예는 이란의 민족주의 체제 모사테크 정권의 전복과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권의 붕괴작전입니다. 1941년 영국의 후원으로 이란을 통치해 온 팔레비는1951년 민족주의자 모사테크에 의해 축출당하였고, 모사테크는 영국 투자기업인 영-이란 석유회사(Anglo-Iranian Oil Company)를 국유화합니다. CIA의 다음 작전 대상은 1952년 농지개혁법에 따라 미국 기업 ‘유나이티드 프루츠’(United Fruits)의 비경작 토지를 국유화 과정을 통해 몰수한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입니다. 심리전이 주요한 작전에서 1854년 6월 아르마스는 소수의 군부대를 아끌고 미군의 공군 폭격 지원과 비밀 라디오 방송의 흑색선전으로 큰 힘 들이지 않고 아르벤스 정권을 함락시켰습니다. 캐네디 정권 들어서 행한 CIA 비밀활동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쿠바의 피그만 침공과 이것이 실패한 후 카스트로 제거를 위해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직접 지위한 몽구스 작전, 베트남전 개입 등을 들 수 있습니다. CIA는 베트남전에도 개입하여 1960년대 후반에는 만여 명에 달하는 특전사와 CIA의 자금 지원을 받는 3만명의 산악부족을 훈련·지원하였습니다. CIA는 베트남에서 통비(通匪)분자 색출과 처단이라 할 수 있는 ‘불사조 작전’(Phoenix Operation)을 실시하여 2~3년 사이 4만명의 민간인을 억울하게 희생시켰습니다. 베트남전 패전 이후 CIA의 대중적 위상 하락과 미국의 제3세계 군사개입을 거부하는 이른바 ‘베트남 증후군(Vietnam Syndrome) 현상으로 닉슨 정권은 간접 개입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이 시기에 칠레의 아엔더 정권 전복 계획은 칠레의 통신망을 장악하고 있는 ITT와 코카콜라사의 요청에 따라 닉슨과 키신저가 NSC의 결정으로 CIA를 동원하여 추진했습니다. 1975년 포드 정권 때에는 미 의회 내에 정보기구에 대한 특별위원회가 설치되는데, 상원의 특별위원회는 CIA의 비밀활동 역사와 카스트로 암살 등 암살 계획을 밝혀 냈습니다. CIA 국장 스탠스필드 터너는 정보수집과 분석기능을 강화하는 대신 비밀공작 기능을 부분적으로 해체하는 조취를 취해 820개의 직책을 폐지하고, 200명의 비말활동 경력요원과 600명의 대체요원이 해체되었습니다. 레이건의 등장으로 CIA는 다시 살아났으며, 1980년 CIA는 9,200명의 요원이 있었으나, 1985년에는 15만명이 넘는 상황으로 발전합니다. 이란-콘트라 작전이 대표적인 청부작전의 사례로 이스라엘의 무기를 이란에 팔아 인질문제를 해결하고, 그 무기 판매 수익금을 니카라과 반군 원조자금으로 활용한 1석 2조의 작전이었습니다. 레이건에 이어 대통령이 된 부시 대통령은 CIA 국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노리에가를 제거한 파나마 침공과 같은 군사개입과 심리전을 위주로 한 정치공작을 함께 펼칩니다. 4. 라틴 아메리카 – CIA의 공작정치와 마약정치로 물든 파나마침공 라 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가 라틴 아메리카를 하나의 독립된 연방제 국가로 묶고자 노심초사했던 이유는 장차이 지역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이런 구상은 영국과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분열 정책으로 라틴 아메리카가 20여 개국으로 분열되면서 좌절된다. 1823년 미국의 먼로 독트린(MonroeDoctrine)을 가리켜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이라고 짤막하게 설명하는데, 사실 먼로 독트린은 불간섭주의, 고립주의 정책이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식민주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의미하는것이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을 통해 카리브해 일대의 패권과 필리핀 점령을 통해 태평양에 미국의 팽창 전략의전진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관통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해로를 찾고자 했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장장 1만 5천 킬로미터를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파나마 운하 건설을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페르디낭드 드 레세프였지만공사는 여러가지 악재들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뒤이어 미국이 중단된 파나마 운하 건설권을 인수하려 했을 때 파나마를 통치하고있던 콜롬비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미국은 파나마의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하여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시켜 파나마 운하의 건설권과운영권을 차지하고, 이른바 ‘파나마 운하지대’로 불리는 파나마공화국의 영토 중 5%를 할양받게 된다. 이 지역에서 미국은 운하의운영 및 관리는 물론 사법권까지 행사하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했다.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콜롬비아의 식민지로 독립 이후에는 미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파나마인들이 자주적인 목소리를내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세기 초엽의 일로 1963년에는 파나마 운하지대에 파나마 국기를 게양하려던 학생 23명이 미군과의충돌로 사망하기도 했다. 쿠바혁명의 영향으로 각성하기 시작한 반미운동의 물결은 파나마에도 몰아쳐 1971년부터 파나마 운하사용과 관련된 협상에서 파나마측은 미국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게 된다. 1968년 아리아스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정권을 장악한 토리오스 정권은 1973년 이 문제를 국제 문제화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정권을 장악한 토리오스였지만 1969년군부 반란 움직임이 미국의 사주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자 제3세계 비동맹권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쿠바와 국교를정상화하는 등 국내 기반을 강화하며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 구조를 개선하려 했다. 토리오스는 미 CIA의 지휘 아래 있는정보요원 출신으로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대규모 농장지대에 대한 좌익운동을 감찰하는 역할을 맡았던사람이었다. 그는 제3세계 국가의 많은 군부 엘리트들이 그러했듯이 미국이 운영하는 군사학교13)를 다니면서 다양한 훈련을받았고, 마누엘 노리에가는 그의 오른팔이었다. 파나마 운하 문제를 UN에 상정하자 이에 압박을 느낀 미국은 협상 과정에서 파나마 운하에 미군을 영구주둔시키는문제를 협정에 명시하고자 했다.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파나마의 토리에스 정권은 정보기구 G-2를 동원해 파나마 운하 일대에서반미시위를 벌이도록 하는 한편 G-2의 책임자였던 마누엘 노리에가를 막후 협상대표로 삼아 워싱턴에 파견하여 사용료 인상에합의하는 등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때 노리에가는 당시 CIA 책임자였던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나면서CIA와 밀착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노리에가는 파나마 운하 지역 내에 위치한 남부사령부의 자금 지원을 받으며 동시에 니카라과의산디니스타 정권과 중남미 마약 조직의 움직임에 관해서도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레 이건 등장과 때맞추어 1981년 토리에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파나마 실질적인 실력자로 부상한 노리에가는레이건 정권의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 전복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는 CIA의 여러 비밀 공작들‘이란-콘트라 게이트’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 것이다. 노리에가의 체포 후 월스트리트지의 폭로에 따르면 부시 전 대통령이CIA 국장으로 있던 1976-1977년 매년 11만 달러를 노리에가에게 공작금을 건넨 것을 비롯해서 총 1천 1백만 달러상당의 돈을 지급해왔다고 한다. 한 나라의 최고 실권자가 미 CIA의 앞잡이14) 역할을 해온 것이다. 미국의 중남미 정책은 미국 자본주의 기본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 이전까지 중남미에서미국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식은 해병대와 포함(砲艦)을 동원한 직접적인 무력 침공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반미 감정에 의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고,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공개적인 무력 침공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을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정책보다는 CIA를 동원한 비밀 공작에 주력하게 된다. 이후 미국의 CIA가 개입된것으로 확인된 라틴 아메리카의 정변은 과테말라 아르벤즈 정권 전복(1954), 쿠바 피그만 침공(1961), 도미니카 공화국내정 개입(1965),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1973), 니카라과 내전(1981-1983), 엘살바도르내전(1981-1983) 등 다양하고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 베트남 전쟁 결과 조성된 미국 내 여론 역시 CIA의 비밀활동에대해 의회의 규제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므로, 미국은 CIA와 같은 공식기구가 아니라 그 실체가 좀더 명확하지 않은 일종의청부조직을 가동하게 된다. 그 와중에 터져나온 것이 ‘이란-콘트라 게이트’였다. 니 카라과는 1855년 미국의 해적 윌리엄 워커에 의해 처음 침략당한 후, 1909년부터 1934년까지 지속적으로미국의 침략을 당했다. 1934년 민족주의 지도자 세사르 아우구스토 산디노가 암살되었고, 그를 살해한 아우구스타시오 소모사가미국 해병대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고, 소모사와 그 일족은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으로 타도될 때까지 이 나라를 통치했다.소모사 정권이 얼마나 폭압적이고 살인적인 통치를 펼쳤는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조차 그를 가리켜 “소모사는 개새끼였지만우리의 개자식이다.”15) 말했다. 소모사를 타도하고 니카라과의 정권을 장악한 산디니스타 정권은 1980년대 미국의 최대고민거리였지만, 1982년 미국 의회는 니카라과 정권 전복을 목적으로 CIA가 비밀리에 활동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CIA는1984년 니카라과의 항만에 비밀리에 어뢰를 설치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는 일체의 개입을 금지시켰다. 이 시기는 ‘레이건의보수주의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의 힘에 의한 세계 전략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로 미국은 니카라과의 반군(콘트라)을 지원할예산이 봉쇄되자 니카라과 반군은 마약거래를 통해 자금을 마련했고, 미국은 세계 각국에 콘트라를 지원할 명목으로 자금 지원을요구한다. 게다가 미국은 비밀리에 사우디 아라비아의 무기상인 카쇼기를 통해 이란에 무기를 팔고 그 판매대금을 니카라과 반군지원에사용하도록 했다. 이때 미국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이룬 것이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였다. 탈냉전이 시작되던 19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노리에가에 대한 파나마 국민들의 반발이 심해지고, 노리에가가 국제마약밀매업에 깊숙이 개입해온 것을 두고 미국 내 여론의 비판이 심해졌다. 미국은 1989년 12월 20일 파나마의 민주헌정을회복하고, 국제마약밀매 혐의자인 노리에가를 미국 법정에 세운다는 명목으로 파나마를 침공했으나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은1980년대 말 탈냉전이 시작되면서 세계 도처에서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군부통치가 종식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미국의새로운 세계전략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힘의 우위에 의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력 소모가 커지면서 경기침체가 지속되고,제3세계의 군부통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강해지고, 미국 경제의 하락으로 이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군부정권의 경제 관리능력이한계에 달하게 된다. 미국은 민중혁명이 발생하기 전에 저항 세력 가운데 친미적인 개혁 세력을 내세워 문민정부를 수립하도록 지원하는재민주화 전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에 저항한 파나마의 노리에가는 미국의 직접적인 공격에 의해 일종의 시범 사례로 제거된것이다.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노리에가 축출을 지지하면서도 미국의 이런 방식을 비난하고, 국제법상의 ‘범죄적 행위’로규정했다. 이는 미국이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로 귀속되는 파나마운하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유지하겠다는 것과 동시에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국제법에 제약받지 않고 강제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기도했다. 미국의 침공 당시 파나마 민간인 300여명이 희생당했다. 그러나 미국의 파나마 침공 당시 미국 언론의 주요관심사는 국제법 무시로 인한 비난이나 파나마 민간인 피해가 아니라 이 작전에 최초로 실전 참가했던 F-117 스텔스 폭격기의성능이었다. F-117 스텔스 폭격기는 걸프전 당시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공격의 95%를 담당하며 그 성능을 맘껏 뽐내기도했다. 5. “개도국 富유출 경제공작 있다” 前 美안보국 직원의 양심선언 (::경제 저격수의 고백 / 존 퍼킨스 지음 / 황금가지::) 미 국 국방부가 ‘차세대 디스플레이’ 개발을 위해 한국 전자업체들에 전략적 제휴를 비밀리에 제의해왔다는 보도가 최근있었다. 국방부까지 나서 세세하게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산업전쟁으로까지표현되는 현재 자본주의 경쟁체제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 책은 ‘산업스파이’의 수준을 뛰어넘어 미국이 어느 정도까지 국익을 위해 국가적으로 ‘비밀공작’을 펼치고 있는지를 그중심에 있던 사람이 직접 고백한 내용이다. 저 자는 실제로 1971년부터 10년 동안 인도네시아와 콜롬비아, 에콰도르 등지에서 ‘경제 저격수(EconomicHit Man)’로 미국 기업과 정부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 사람이다. 그는 1945년 뉴햄프셔주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보스턴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고교시절부터 부친의 지나친 기대에 좌절을 경험했다. 경제저격수란 겉으로는 국제 컨설팅 회사의 직원으로 개발도상국을 돕는 경제전문가처럼 행세하지만 실제는 미 국가안보국(NSA)에서 훈련을 받고 해당 국가의 국고(國庫)를 미국이 손쉽게 ‘털어내도록’ 공작을 벌이는 사람이다. 그 선발 과정부터 섬뜩하다. 그 사람의 지식수준이나 도덕적 가치나 심지어 애국심도 오히려 선발에 장애가 된다. 그보다는 삶의 과정에서 겪은 좌절을 통해 얼마나 적개심을 품고 있는지, 여자를 원하고, 근사한 삶을 꿈꾸는지가 더 중요하다.공작에는 숭고한 가치는 방해물이 되기 때문이다. 일단 선발되면 마음대로 그만둘 수도 없는 공작원으로서의 삶이시작된다. 목표로 정한 국가에 민간인 신분으로 들어가경제성장률을 부풀려 예측하고 그에 따라 기간산업의 개발계획을 수립한다.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도록 표적 국가의 정·재계요인에게 접근한다. 그 과정에서 회계부정과 선거조작, 뇌물, 섹스가 동원되기도 한다. 그들이 실패하면 그 다음엔 ‘자칼’이라는 미중앙정보국의암살자가 나선다. 저자는 1981년 원인불명의 사고로 숨진 하이메 롤도스 에콰도르 대통령과 오마르 토리호스 파나마대통령이이들 자칼에게 살해 당했다고 주장한다. 자칼이 동원돼도 공작이 성사되지 않으면 그 다음은 젊은 미국 군인을 동원한전쟁으로간다. 개발도상국들이 이같은 경제저격수의 마수에 걸려 일단 차관을도입하면 그 차관으로 이뤄지는 모든 개발계획은 미국기업에 돌아간다. 개발이 된다한들 부풀려진 경제적 예측에 의한 것이 제대로 운용될 수 없다. 결국 이들 나라는 국부를 미국기업에 유출하고 극심한 경제적 파탄에 시달리게 된다. 책은 그같은 사례를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저자는 이같은 미국의 경제적공작의 근원을 거대기업과 정부, 은행이 삼위일체가 돼있는 미국 특유의정치체제인 ‘기업정치’에서 찾고 있다. 저자는 저격수로 활동하는 동안 이혼을 했으며, 친구였던 파나마와 에콰도르 대통령의 의문사를 경험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1980년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 책이 나오는 과정에서 많은 협박과 회유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엄주엽기자 문화일보 2005-04-08 우리는 제국주의 단원을 통해 인간의 끝 없는 탐욕이 각종 음모와 전쟁과 학살과 경제적 혼란이라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서 1/14~15 그러나 누구든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을 받을 때 시험을 당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 참고 서적 1. 강대국의 흥망 (폴 케네디, 한국경제신문) 2. 대영제국 쇠망사 (나카니시 테루마사, 까치) 3. 밀실의 제국 (김민웅, 한겨레 신문사) 4. 국부론 (아담 스미스, 범우사) 5. 세계 제2차대전사 (이대영, HOBBIST) * 참고 사이트 |
2010년 2월 15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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