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6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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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릉 10 관심사

2009/11/2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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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 24대 임금 진흥왕

재위 서기 540년 7월 ~ 576년 8월, 36년 1개월간.

왕릉 소재지: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92-2









법흥왕이 사망하였다.

신라 왕릉 9에서 얘기하였듯이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대한 논란은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 전해지고 있는 '법흥왕릉'이 왕릉이라 부르기에 너무도 적합하지 않은 규모임을 감안하여 서악고분군에 있는 연이어진 대형

고분 중 하나로 추측하고 있다.



나중에 얘기할 테지만 진흥왕도 역시 애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이 되었는데 역시 전해지는 진흥왕릉도 규모가 왕릉이라

볼 수 없다.

더구나 한 세기를 풍미하고 통일 전 신라의 최대 세력판도를 형성한 최고군주 진흥왕의 릉이라고 하기에 지금의 묘는 너무도

터무니 없다.

傳진흥왕릉. 높이 7미터. 직경 10미터. 높이가 낮은 것은 아니나 왕릉급으로 보기엔 확연한 무리가 있다.





진흥왕에게 법흥왕은 큰아버지이다. 진흥왕의 아버지는 법흥황의 동복 아우인 입종갈문왕이며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지소이다.

(따라서 지소는 진흥왕의 어머니임과 동시에 사촌간이기도 하다.. 당시는 왕족 혈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근친혼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으므로 자기 대의 관계는 의미가 없다. 아버지 대의 관계가 어찌되었느냐가 더욱 중요하였다. )



본래 법흥왕에겐 딸과 아들이 있었다. 아들의 이름은 비대이다. 당연 아들인 비대가 법흥왕의 뒤를 이어야 했다.

헌데 비대의 어머니인 옥진은 골품이 없었다고 한다. 본시 알려진 글들을 읽어보면 성은 부계를 따르지만 골품은 모계를 따른다

고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비대의 어머니인 옥진이 골품이 없다는 것은 옥진의 어머니인 오도가 골품이 없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그 오도의 어머니는 소지왕의 왕비인 선혜부인이다. 선혜부인은 이벌찬(당시 신라 최고 직급) 내숙의 딸이므로 당연히

골품이 있다.

그러면 선혜부인도 당연히 진골 귀족이다. 다만 그 선혜부인이 남편 소지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승려 묘심과 사통하여 딸을

낳게 되는데 이 딸이 오도이다.

그렇다면 골품은 모계 혈통을 따른다는 얘기에 따라 당연 오도도 골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품이 없다는 얘기가 성립하려면

1. 골품이 없었던 아버지 묘심을 따라 골품이 없었거나

2. 사통하여 낳은 자식에겐 골품을 부여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어찌되었든 선혜부인이 묘심과 사통하여 낳은 딸 오도는 궁에서 살았고 그래서 당시 태자였던 법흥왕의 눈에 띄어 애첩이

되었다.

신라의 궁궐인 월성의 모습.

월성 복원도



그런 와중에 이 오도가 다시 이번엔 당시 진골 귀족이었던 위화랑과 사통하여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이 바로 아까 말한 법흥왕의 후궁인

옥진궁주이다. (법흥왕은 어머니와 딸을 동시에 애첩으로 두었던 것이다..) 화랑세기에서는 이 옥진마저 골품이 없었고 그로 말미암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다.)

골품 없는 묘심과 사통하여 낳은 딸이므로 골품이 없었다는 오도, 진골귀족인 위화랑과 사통하여 낳은 딸임에도 골품이 없는 옥진.

모순이 발생한다.

골품이 모계를 따른다는 말은 선혜부인의 사통한 딸 오도에게서 옥진으로 이어질 때 틀렸다. 원칙상 골품이 모계로 이어지지만 사통

하여 낳은 자식에게는 골품을 부여치 않는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부합할 것이다.

아무튼 그 옥진은 자라서 박영실에게 시집을 갔다가 다시 법흥왕의 후비로 들어갔다.

(여기서 경악할 또 하나는 왕이 아님에도 박영실은 옥진의 어머니와 사통관계였고 또한 옥진과는 결혼까지 한 것이다. 실제로 옥진의

어머니와 박영실 사이에 낳은 딸이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부인이다.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신라사람들은, 적어도 신라 귀족들은 아버

지만 다르면 같은 어머니에게서 낳은 자식이라도 금혼자가 아닌 것으로 보아 결혼하고 아이까지 가졌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전통은 일본에서도 근대까지 이어진 내용이다.)



얘기가 쓸데없이 길어졌는데, 법흥왕은 당당한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 비대는 왕위를 잇지 못한다.

그 어머니인 옥진궁주가 강한 정치적 힘이 있었으면 얘기가 달라졌을 테지만 그러하지 못했고 자신의 외손자가 왕위를 잇는데 조력을

해야 할 위화랑은 너무도 공명정대한 사람인 탓으로 자신의 딸이 골품이 없고 또한 한때 박영실과 같이 산 적도 있는 지라 그러한 자신

의 딸이 비록 법흥왕의 아들을 나았다 할 지라도 자격이 충분치 않다고 반대하고 말았다.(분명 이해관계가 얽힌 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탓일게다.)

그렇게 하여 왕의 자식이 분명 있음에도 법흥왕의 사후 왕위는 법흥왕의 정실 부인에게서 낳은 딸인 지소부인의 아들이 잇게 된다.

지소부인은 정실에게서 낳은 법흥왕의 공주였고 그 공주인 지소부인의 남편은 법흥왕의 동복동생인 입종갈문왕이다. 따라서 이들의

정치적 위세는 법흥왕의 사후 최고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비록 왕의 아들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그 아들이 후궁의 자식이란 약점과 , 또한 명망이 있었던 외할아버지 위화랑

마저 지소부인과 정치적으로 협력을 하게 됨으로써 정식으로 왕위를 이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리하여 정치적으로 크나 큰 힘을 갖고 있는 지소부인의 아들이 왕위를 이으니, 옥진궁주의 아들 비대의 억울함은 차치하고 통일 전

신라의 판도를 가장 크게 키운 24대 신라 군주 진흥왕이다.

진흥왕 당시의 신라 판세



하지만 너무도 강인한 어머니를 모신 진흥왕이었다. 겨우 7살 멋도 모르는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니 모든 것은 어머니가 섭정하였다.

어머니는 태후가 되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였다.

아들이 왕이 된 7살 때 박영실과 오도 사이에서 태어난 사도부인 박씨가 진흥왕의 정식 왕비로 책봉되었는데 당시 박영실이 어떤

정치적 힘이 있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이 며느리로 삼은 것인지 지소태후는 며느리인 사도부인 박씨를 너무도 싫어했다.

그리고 당황스럽게도 지소태후는 자신과 박이사부(독도는 우리땅에서 나오는 신라장군 이사부) 사이에서 사통하여 낳은 딸인 숙명

궁주를 진흥왕의 후비로 들이게 했다. 자신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킨 것이다.

진흥왕도 이 숙명궁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숙명궁주 역시 배다른 오빠인 진흥왕을 좋아하지 않았다. 숙명궁주는 4대화랑인

이화랑에게 마음을 주고 사통하는 관계였고 이 사통하는 현장을 몇 번 진흥왕에게 틀키기도 하였다.

진흥왕은 그러한 숙명궁주를 내치고자 하였으나 둘 모두의 어머니이기도 한 지소태후가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신라의 가장 큰 세력판도를 형성한 진흥왕이었지만 이러한 강한 어머니때문에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이러한 억

압은 진흥왕 말년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죽자 마음대로 여자를 가리지 않고 취하며 정사를 돌보지 않게 한 가장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명목상 진흥왕대에 신라 화랑도의 최초 제도가 섰다. 선화와 원화 제도가 그것이다.

원래 선화는 귀족 남자 한명을 선화로 삼아 그 아래에 신라 귀족의 자제를 두어 여러 것을 배우고 즐기는 무리였고, 원화는 귀족 여자

한 명을 원화로 삼아 마찬가지로 신라 귀족의 자제들이 그 아래에 모여 세력을 형성하게 한 것이다.

이때 1대 선화가 바로 지소태후와 정치적 협력을 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비대의 왕위계승을 반대한 위화랑이다. 1대 선화의 이름이 위

화랑이었므로 선화의 가장 우두머리를 그 이후로 화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풍월주 계보도 (출처: http://hwarang.culturecontent.com/ME-011104/ME-01110401.asp)



첫해 지진이 있었고 10월(양력 11월,12월)에 복숭아꽃이 피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당시 이상 기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사람도

있다.

혹은 어떤 정치적 사건에 대한 암시인 지도 모른다.



진흥왕 2년엔 지소태후가 자신의 정부 박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아 병권을 쥐게 해주었다. 이미 신라 화백 제도에서 귀족들이 군사적

결정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지소태후의 권력을 막강했다. 또한 그만큼이나 박이사부가 처음부터 실권을 쥐고 있었던 것으

로도 보인다.



5년엔 당시 금지되었던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금지되어서 승려가 없었다는 건 아니다. 공식적으로 인정한 승려가

없었을 뿐이다.)

이 전부터 또한 그 이후로 진흥왕의 대불교정책은 언제나 전폭적이었으며 진흥왕은 말년에 자신 또한 법복을 입고 승려 생활을 했다.



6년엔 역시 지소태후의 정부 박이사부가 역사책을 만들자고 주장하여 거칠부에게 작성하라고 명하였다. 흔히들 국사 시험을 볼 때

거칠부의 '국사' 라고 읽으며 외워서 거칠부가 제안을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거칠부는 그저 명을 받아 만든 사람이고 최초로 역사를

책으로 남기자고 한 사람은 그 유명한 울릉도를 우리땅으로 편입한 신라장군 (박)이사부이다.

(진흥왕은 당시 13살이다. 왕위를 6년이나 해왔으니 공부도 많이 했을테지만 이런 것을 다 결정하고 하는데 거의 지소태후가 관여했

음은 그냥 뻔히 보이는 추측이다.)

18세기 일본인이 작성한 '총회도'의 일부분. 울릉도 부분이 조선의 색과 같은 노란색으로 되어 있다.

울릉도 옆의 부속도서인 독도도 역시 마찬가지가 된다.



진흥왕의 제대로 된 모든 정치적 사건에는 거의 모두 박이사부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만큼 지소태후가 박이사부를 중용했기도 했고

박이사부가 병권을 쥔 최고 지휘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진흥왕이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어머니 등살에 휘둘린 반면 당대에 박이

사부, 사다함 등 유명한 장군들이 신라의 판세를 괄목할 만하게 확장하였으므로 진흥왕은 자의든 타의든 통일 전 신라의 최강 군

주가 된 것이다.



법흥왕 때부터 가야는 위험에 빠져 있었다. 그중 가야의 맹주격인 금관 가야의 마지막 왕 구해가 법흥왕 19년에 나라를 들어 신라에

바쳐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구해)의 릉으로 알려진 곳. 구해를 마지막으로 금관 가야는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되었으며

나머지 가야국들도 확연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가야계는 엄청 고립된 듯해 보이지만 적어도 귀족, 김유신 가문만은 구해왕의 5대조 조상부터도

어머니가 전부 신라 왕녀였기에 몇 대에 걸쳐 이름만 가야 김해 김씨의 명맥을 이었을 뿐 모든 족보 관계가 김유신에 이르면 신라

왕족과 9대에 걸쳐 얽히고 설킨 완벽한 신라의 진골 귀족이었다. 어머니의 계열을 많이 따졌던 신라 입장에서 보면 김유신은 당대

에 어머니가 진평왕의 여동생이기까지 했으니 최고위급 귀족이지 어디서 가야계 가야계 하며 힘으로 밀리거나 흔들릴 위치는 아

니었다. 물론 알짜배기 신라 귀족들한테는 속으로 욕 먹었을 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진흥왕 대에는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 장군과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한 지역의 최고 관직을 담당하며 당당히 살아가고 있었다.

백제와의 전투중 유명한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대군을 데리고 공격을 해왔을 때에 신라의 상황은 불리했었다. 그때 김무

력장군이 전방의 군대를 끌고 와 도와서 백중세를 유지하다가 백제 성왕은 신라 복병에 목을 잘리고 말았다.

주황색 부분에 있는 관산성(출처: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2979&logId=3085007)





삼국사기의 진흥왕 대에서 우륵의 얘기가 등장한다. 너무도 얘기가 발을 넓히니 이는 접는다.

일본의 왕실 창고 정창원에 수장 중인 신라에서 전해진 가야금





아무튼 수많은 전투들, 그리고 속고 속이는 위계들, 대의보다는 실리를 따진 정책들을 통해 백제를 돕는 척 하며 빼앗은 한강 일대의

땅들(한강 지역을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이 다스렸다.), 창녕 일대의 비화가야 복속 등 진흥왕 대에는 그야말로 외길로 성장만을

했던 시기였다.



진흥왕은 전대보다 확연히 넓어진 영토의 최전방들을 순방하고, 그 순방한 곳마다 순수비를 세웠다. 또한 그 지방의 세금을 면제하

였다. (적국의 영토였던 것을 복속한 직후이니 이러한 정책은 당연하다.)







황초령 비 (현재 북한 함흥 역사 박물관 소장)



단양 적성비





창녕비(출처: http://www.nanalc.com/bbs/view.php?id=freeboard&no=212)





고구려와의 전쟁도 순조로웠다. 당시 고구려는 돌궐에게 수도 평양을 위협받는 등 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래쪽의 신라가 팽창하는

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이 대륙의 적들을 경계하는데 몹시 분주한 고구려를 상대로 진흥왕의 신라는 함경도까지 진출하여 진흥왕이

직접 함경도 마운령까지 순행하는 등 당시는 신라에게 적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갈 때 즈음 가야의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또한 박이사부가 나서 (그 유명한 미실의 남자 사다함과 함께.) 진압하였고 더는 신라 안에 골칫거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최고였다. 모든 것이 더 바랄 것이 없이 진행되어갔다. 영토는 넓어졌고 그에 따라 그의 권력은 무한히 커졌다. 저항하거나

견제할 수 있는 어느 귀족 세력도 없이 단지 어머니만이 자신의 유일한 걸림돌이자, 또한 열렬한 조언자였을 뿐이었다.



그러한 때에 그 강력한 어머니 지소태후가 최후를 마쳤다.

이제 그 위엔 누구도 없었다. 그에게 강력한 우군이자 또한 강력한 걸림돌이기도 했던 어머니가 죽자 그의 상실감 또한 무척이나 컸

을 것이다.

그에게 권력은 더이상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것이었다.

더 추구할 무언가도, 제어할 무언가도 없자 그는 결국 여자에 대한 탐욕에 빠져들었다.

아이를 낳은 첩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루 셀 수 없는 여자들을 탐했다. 드라마 상의 유명한 미실도 이때 그러했다.

얼마간은 아예 정사도 돌보지 않고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허나 수많은 시간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상높게 가장 큰 신라를 일으켜왔던 진흥왕의 토대는 달랐다.

그 주색잡기 또한 아무 의미없는 허무한 것이었음을 느꼈던 것이다.

주색 잡기 동안 그걸 따라하느라 여념이 없던 태자가 진흥왕 자신의 애첩(보명궁주)까지 관계하고 있던 사실과 그 애첩에게 몰래

가려고 담을 넘다가 애첩 집 개에게 물려 죽는 사건이 일어나자 크게 통탄하고 분개했다.

모든 것은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자신이 색을 탐하지 않았더라면 보명궁주와 태자의 그런 불상사 또한 없었을 것이었다.

모든 것이 허망했다. 신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었던 들 무엇인가. 자신에게 그러한 것은 과연 행복이었던가.

모든 것을 누렸지만 모든 것이 의미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평소에도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불교에 아예 몸을 담아 귀의하였다.

스스로 자신의 법명을 '법운'이라고 하고 승려가 되었던 것이다.

진흥왕이 자주 찾아 수도하였다는 선운산 진흥굴



진흥왕은 그 찬란한 영광을 뒤로 하고 마흔 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그리고 법흥왕과 같은 기록인 애공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나오는 진흥왕 역의 이순재처럼 노인이 아니었다. 올해로 따지면 1967년 생인 마흔 셋 남자들의 삶을 살다가

사망하였다.



1967년생 마흔 셋인 남자 연예인은?



위의 사진들 속 연예인과 같은 나이의 중년이 색을 탐하다가 죽은 것이라면 이해라도 가련만 마흔 셋의 진흥왕을 드라마에서는 너무 늙고

노회한 왕으로 표현했다.



그러면 왕의 장지인 애공사 북쪽은?

역시 얘기는 법흥왕릉에 대한 얘기와 같아진다.



현재 애공사 터는 너무도 초라하다. 탑은 비록 우리나라 보물인 수준급의 예술성을 보이지만 정말 애공사인지는 알 수가 없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현재의 애공사 추정지는 '애공사 북쪽'이라 하고 알려진 법흥왕릉이 너무도 말이 안되는 것으로 보여 맞지

않는 것 같다.

더구나 진흥왕릉을 보자.



위의 법흥왕릉과 같은 축척으로 본 진흥왕릉이다. 역시 아래의 태종무열왕릉 밑 그 위에 위치한 초대형 고분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더구나 혀재 진흥왕릉이라고 붙여놓은 고분은 통일신라시대 시기의 무덤으로 전혀 얼토당토않다.



자 그럼 모두 애공사 북쪽이라고 해놓은 무덤들을 한 사진에 모아보자.



애공사가 저곳이 맞다면 기록상 애공사 북쪽이라고 나온 법흥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이 모두 북쪽인 듯도 하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내물왕릉은 첨성대 서남쪽에 마련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삼국유사) 이 정도가 당시 확실한 방향이라면

법흥왕릉은 애공사 북서쪽, 진흥왕릉, 진지왕릉은 애공사 북동쪽에 있다고 기록하지 않았을까?

하나같이 세 왕릉을 모두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쉽게 생각해보면 같은 위치에

세 왕릉이 나란히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물론 세 왕릉이 나란히 있었다면 역시 누구의 장지 옆에 묻혔다. 라고 할 수도 있었을테지만..)

단순한 추리로 그렇게 생각해보자면

저기 선도동 주민센터 바로 위에 있는 일렬로 서 있는 천마총급의 대형고분 네 개. 바로 그곳이지 않을까?

애공사가 현재 추정하는 그곳이 아니라 그 일렬로 서 있는 고분군 아래의 어느 장소였지 않았을까?

만약 애공사 위치가 그러하다면 법흥왕릉도 애공사 북쪽, 진흥왕릉, 진지왕릉도 그렇게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통일 전 시기의 왕릉급 규모를 감안해도 그래야 맞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네 개의 고분이 후보가 되고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 네 개의 고분은 또한 통일 전 신라의 무덤양식인 적석목곽분으로 추정이 되므로 연대상으로도 어긋나지 않는다.



언제 발굴이 될 지는 모르지만 역시 더 나은 보존 기술이 발명될 때까지 또 그 확인은 미루는 수밖에 없겠다.





삼국사기 진흥왕 원문



진흥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삼맥종이다.[혹은 심맥부라고도 한다.] 이 때 그의 나이 일곱살이었다. 그는 법흥왕의 아우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김씨부인이며 법흥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왕태후가 섭정하였다.



원년 8월, 대사령을 내렸다. 문무관들에게 작위 한 급씩을 올려 주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복숭아 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었다.

2년 봄 3월, 눈이 한 자나 쌓였다.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임명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관한 업무를 맡게 하였다.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6년 가을 7월, 이찬 이사부가 왕에게 "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고 나쁜 것을 만대 후손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를 책으로 편찬해놓지 않는다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왕이 깊이 동감하고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선비들을 널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9년 봄 2월, 고구려가 예와 함께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은 장군 주령을 보냈다. 주령은 정병

3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였다. 주령은 포로를 많이 잡아 왔으며 죽인 자도 매우 많았다.



10년 봄, 양 나라가 사신과 유학승 각덕 편에 부처의 사리를 보내 왔다. 왕이 백관들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서 그들을 맞이하

게 하였다.



11년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했다. 군사 1천명을 그 곳에 머물게 하여 수비하게 하였다.



12년 봄 정월,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었다.
3월, 왕이 순행 중에 낭성에서 묵으며, 우륵과 그의 제자인 이문이 음악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초청하였다.

왕은 하림궁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두 사람은 각각 새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에 앞서 가야국의 가실왕이 열

두 달을 음률로 상징하는 12현금을 만들고, 우륵으로 하여금 이에 맞는 악곡을 짓게 했었다. 그러나 가야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 나라로 귀순해왔었다. 이에 따라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이라고 하였다.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이를 기회로 열 곳의 군을 빼앗았다.

13년, 왕이 계고, 법지, 만덕 세 사람으로 하여금 우륵에게서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참작하여, 계고에

게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가르치고,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학업이 끝나자 왕이 그들로 하여금 연주하게

하고는, "전일 낭성에서 듣던 소리와 다름이 없다"라고 말하며, 후하게 상을 주었다.



14년 봄 2월, 왕이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그 터에서 황색의 용이 나타났다.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서 궁궐을 고쳐 절을 짓고, 황룡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가을 7월,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아찬 무력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백제의 왕녀를 맞아 소비로 삼았다.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백제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신주의 군주 김 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

도가 재빨리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 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6백 명을 참살하였다. 백제군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16년 봄 정월, 비사벌에 완산주를 신설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북한산을 순행하여 국경을 정하였다.
11월, 왕이 북한산에서 돌아와 교서를 내려, 순행했던 주와 군에 1년 간의 납세를 면제해주고, 해당 지방 죄수 가운데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17년 가을 7월, 비열홀주를 설치하였다. 사찬 성종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18년, 국원을 소경으로 만들었다. 사벌주를 없애고 감문주를 설치하였다. 사찬 기종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신주를 없애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19년 봄 2월,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호민들을 국원으로 이사하게하여 국원을 충실하게 하였다. 내마 신득이 포와 노를 만들어

바쳤으므로, 이를 성 위에 설치하였다.



23년 가을 7월, 백제가 변경의 주민을 침탈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서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 가야가 모반하였다. 왕은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고, 사다함으로 하여금 이사부를 돕게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으로 들어가서 흰 기를 세우자, 성 사람들 전체가 두려워하여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인솔하고 그 곳에 도착하니, 그들이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공로를 평가하는데 사다함이 으뜸이었기에 왕이 좋은 밭과 포로 2

백 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왕이 강력히 권하므로 포로를 받았다. 그러나 사다함은 이들을 풀어주어 양민을 만들고, 밭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백성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25년, 사신을 북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26년 봄 2월, 북제의 무성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사지절동이교위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가을 8월, 아찬 춘부로 하여금 국원을 지키게 하였다.
9월, 완산주를 없애고 대야주를 설치하였다.

진 나라에서 사신 유사와 중 명관을 보내와 예방하고, 불경 1천7백여 권을 보내 왔다.



27년 봄 2월, 지원사와 실제사 두 절이 준공되었다. 왕자 동륜을 왕태자로 봉하였다.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황룡사가 준공되었다.



28년 봄 3월,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29년, 연호를 대창으로 고쳤다.
여름 6월,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 북한산주를 없애고 남천주를 설치하였다. 또한 비열홀주를 없애고 달홀주를 설치하였다.


31년 여름 6월,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2년,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3년 봄 정월, 연호를 홍제로 고쳤다.
3월, 왕태자 동륜이 사망하였다.

사신을 북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20일, 전사한 사졸을 위하여, 지방에 있는 절에서 팔관 연회를 열어 7일 만에 끝냈다.

35년 봄 3월, 황룡사의 장륙상의 주조가 끝났다. 구리의 중량이 3만 5천7근이었으며, 도금한 금의 중량이 1만 1백9십8푼

이었다.

36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황룡사의 장륙상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발꿈치까지 내려왔다.



37년 봄, 처음으로 원화(源花)제도를 두었다. 초기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 낼 수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친구들끼리 여럿이 모여 서로 어울리도록 하고, 그들의 행동 거지를 살펴 본 후에 적절한 자를 천거하여 임용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남모와 준정이라는 미녀 두 사람을 선발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3백여 명의 무리를 모았다.

그런데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술을 강권하였다. 준정은 남모가 취한

후에 그녀를 끌어 내어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모인 무리들은 화목하지 못하여 해산하였다. 그 후 다시

얼굴이 잘생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화랑'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하고, 그를 떠받들게 하였다. 그러자 무리들이 구름

처럼 모여 들었다. 그들은 더러는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더러는 노래와 음악을 서로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 유람하여, 먼 곳이

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인품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었으니, 그 중에서 선량한 인물을

택하여 조정에 추천하였다. 김 대문의 [화랑세기]에는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생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 치원의 난랑비 서문에는 "우리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하였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유불선의 세 가지 교를 포괄하여 중생을 교화하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에서는 효도하고, 집밖에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이요, 무위의 일에 처하며, 不言의 가르침

을 실천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요, 모든 악행을 하지 않고, 모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와 같은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 나라 영고징의 [신라국기]에는 "귀인의 자제 중에서 훌륭한 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민 다음,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백성들이 모두

떠받들어 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을 8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진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독실하게

불도를 신봉하였다. 말년에 와서는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고 법운이라는 법명을 스스로 지어 부르며 생애를 마쳤다. 왕비도

역시 이를 본받아 중이 되어 영흥사에서 살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신라, 왕릉, 법흥왕, 진흥왕, 순수비, 계보, 지소, 지소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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